순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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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명 유래

마을명 유래
마을명 유래
수양(水揚)
  • 옛날 전남 승주군 송광사 금불상을 공주로 옮겨갈 때 이 마을에서 쉬어갔다하여  수양승(修養僧)이라고 불리 움 당시 증산에서 살다가 큰 불이 나서 부락이 소실되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풍수 물명에 수앵정이라 부르다가 꾀꼬리터라 하였으며 조선중기 순천 김씨 일가가 마을 천변에 수양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버드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는곳이라 하여 수양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름
발산(鉢山)
  • 임진왜란 당시 화순 최씨의 증시조인 최충길(崔忠吉)공이 들어와 형성된 마을인데 왜병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모를 피신시킬 수 없어 마을 뒷산에서 부모를 보호하다가 왜군에게 잡혀 순절하였다 뒷산 내룡이 노승예불형(老僧禮佛形)이라 하여 마을이 자리한 형국이 노승의 발형(鉢形)에 속한다 하여 발산(鉢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내동(內洞)
  • 3백여년전 순창 설씨 한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시작된 마을로 가난을 면치 못하고 근근히 살아오던 어느날 한 노승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 집터를 산 밑으로 옮겨야 된다는 말에 따라 옮긴후 마을이 번창하게 되었으며 훌륭한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마을 유형이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내동(內洞)이라 불러 오늘에 이름
연화(蓮花)
  • 3백여년전 남양 홍씨란 사람이 팔도 강산의 유람길에 마침내 아미산(峨?山)기슭에 도착하여 부근에 있는 못을 찾아 물을 마시려다 실수로 그연못에 빠지게 되었다 생사가 위급하게 되었을 무렵 요란한 굉음이 아미산 줄기에서 내려와 연못에 다달아서 연꽃으로 변하게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후 다시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한 연꽃이 물위에 거꾸러 떠 있는 형상을 표현하는 말이 연화도수(蓮花倒水)인데, 마을의 형상이 이와 같아 연화마을이라 불림
동전(銅田)
  • 1567년 명종 22년 설씨, 박씨, 김씨, 가씨등 4성이 정착하여 시작된 마을로 구리동 고개에다 사당을 세웠는데 그 고개를 사당재라 부르며 1919년 금동면과 목과면으로 분리 되었다 금과면 명산인 아미산 정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려와 자리 잡은 것이 마치 와룡(瓦龍)같고 그 기슭이 꼭 구리 밭같아 동전(銅田)리라 부르기시작하였다
대장(大場)
  • 약400년 전에 유명한 설엽학자(薛燁學子)의 서당(書堂)터이며 학문이 높아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선비들을 가르쳐 과거(科擧)에 많은 사람들을 급제(及第)시켜 훌륭한 제자(弟子)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이선생의 추천(推薦)없이는 과거를 치를 수 없었다하여 마을이름도 큰 인물(人物)이 배출된 곳이라 하여 대장(大場)이라부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름.
만촌(蔓村)
  • 남원양씨 28대손인 양지영(陽智永)이 복흥면 외양곡에서 이사와서 살며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며 광덕산 능맥이 넝쿨처럼 뻗어내린 끝자락에 넝클넝클 내려와 넝클 만()자를 넣어서 만촌으로 부름 이조말엽 금동면(앞냇물 북쪽땅) 목과면(앞냇물 남쪽땅)이 행정구역개편으로 금과면 만촌(蔓村)으로 불리어 현대에 이름
대성(大星)
  • 약400연년전에 형성된 마을로 서쪽 3백m지점에 물위봉이란 산 아래 약2백호정도의 봉현이라는 이름의 부촌이었음 물위봉이란 지명은 산이 물위에 떳다하여 그렇게 불리웠는데 물이 너무 많이 나와 마을에 피해가 많으니 물위봉의 물구멍을 막아야 된다고해서 이를 막은뒤부터 마을이 점점 망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말에 대성으로 개칭되었는데 그 유래는 하늘에서 7개의 큰별이 떨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에서 서쪽으로 5백m거리에 별이 떨어졌다는 칠성(七星)바위가 있다
대각(大角)
  • 금녕김씨 사람이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여 마을 뒤산이 큰 짐승의 뿔과 같아 대각(大角)이라 부르기 시작함.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의 형상을 와우(臥牛)라고 하나 누워있는 소의 형상으로는 타당치 못하고 황소가 서 있는 모양으로 뿔이 짝지어있는 형상으로 대각이라 불리움
청용(靑龍)
  • 고려 중엽 밀양 박씨가 금동이라 부르고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룸 후에 풍수지리에 의해 마을의 형국이 푸른 용과 같다하여 다시 바꾸었으며 마을 앞에 물이 귀하기 때문에 생룡이 아니라고도 하여 전쟁과 재난때는 피해를 입지 않아 피난지로 불리어졌으며 그후 행정구역개편으로 청룡(靑龍)이라 칭함
방성(訪聖)
  • 임진왜란 당시 공자의 후손되는 공동(孔童)이 입향하여 공씨 집성촌을 이룸 왜란당시 호가 학제(學濟)인 동자(東字)선생이 전남 화순에서 피난해 왔다 터를 잡아 마을이름을 訪金이라 부름 1891년 고종 28년에 방금보다는 성인을 찾는 마을이란 뜻으로 찾을방(), 성인성() 방성(訪聖)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름
석촌(石村)
  • 조선 숙종때 밀양 박씨 한사람이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며 당시 약3백호나 되는 큰 마을로 번창하였으나 갑자기 식수가 고갈되고 병마가 심하여 다른 곳을 옮겨가는 주민이 많아 마을이 줄어들었다 동네 뒤에 돌이 많고 산수가 좋다항 돌고개라 부르던 것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석촌(石村)이라 부르기 시작함
남계(南溪)
  • 4백여년전 김해 김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아오다가 집안이 몰락하여 이사하고 그후에 유신곤(柳晨坤)이란 사람이 인근 호치마을에서 거주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음 남계 다리앞에 서당재 밑에 동산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남계리에 옮겨오자 마을이 번창함 풍수지리에 의해 마을 형국이 산에서 야생하는 동물의 혈이 있다하여 냉기라 불리우다 후에 남계리로 불리어 오늘에 이름
호치(虎峙)
  • 7백여년전 고려 중엽 경주 설씨가 처음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룸 마을 형국이 호랑이 같다하여 범재라 하여 맹호가 재를 넘어가는 모양맹호월령(猛虎越嶺)이미로 범재라 하였던 것이 한문표기에서 호치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장(獐藏)
  • 5백여년전 경주 설씨인 문정공 장수(長壽)라는 사람이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 마을 뒷산에 있는 고지산이 뛰어가는 노루 형을 하고 있는 형국으로 동쪽의 아미산과 북쪽의 덕진산과 서암산이 같은 형으로 되어 있는데 서쪽의 산세가 약하여 그곳으로 뛰쳐나가는 고지산의 노루형을 본따서 장정리(璋停里)라 부르다  늑곡이라 개칭, 2008년에 장장(獐藏)으로 복원됨
일목(一木)
  • 5백여년전 금녕 김씨가 처음 터를 잡아 이룬 마을로 마을 앞에 오래된 귀목이 있었는데 이 나무가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하여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나 1919년 목과면과 금동면의 합병으로 오지 마을이 되었으며 마을앞 신목을 본따서 일목이라 부름
이목(二木)
  • 고려말 마을 서편 7백m에 서당동이라고 부르는 곳에 왕의 태를 묻는 능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동자석만 남아 있다 마을이름이 언덕 능자와 서당동의 동자를 합해 능동(陵洞)으로 부르다가 191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목(二木)이라 부름
계전(桂田)
  • 1880년경 임실군 삼계면에서 란()을 피해 김광(金光)이 이곳에 와서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지형이 반달형이라 하여 달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를 본따서 계전(桂田)이라 전해오고 있다
신매우(新梅宇)
  • 조선 세조때 휘윤희(諱允熙), 충순위(忠順衛), 소위(昭威)장군이 금과면마암리에서 당시 단종 복위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말에 이 마암리를 매우라 부르다가 삼매우로 외, 중, 신매우를 합하여 행정부락을 이루었으며 광산 김씨, 중매리는 설씨와 홍씨, 신매리는 홍씨가 각각 그 마을의 대종을 이루었다
매우(梅宇)
  • 고려말(高麗末) 두문동 칠십이인중 호() 암곡(巖谷)이란분이 관직을 버리고 바위가 돈다는 이곳에 입향하여 마을이름을 마암(磨岩)이라 부름 이조(李朝) 세종때 풍수지리학에 의해 마을의 형국이 선인독서(先人讀書)라 하여 “아미산은 선비요, 서암산은 촛대봉이요, 매우(梅宇)는 서책이라 하여 선비가 글을 읽는 형국 또는 매화락지(梅花落地)라 하여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매우(梅宇)라 부름 일제(日帝)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모정리(茅亭里)라 개칭하였고 2008년에 매우(梅宇)로 복원됨
밭매우(밭梅宇)
  • 밭매우는 마을 뒤 산기슭에 수백호의 기와집이 들어선 부촌이었으며 마을터가 ‘키’ 형국으로, ‘키’끝 부분인 마을 앞이 허()하여 탑()을 세워 보비(補備)하였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매우의 밖에 있다하여 밭매우라고도 하였고, 1914년 매우마을이 모정리로 개칭되었을 때 밭매우마을도 외모마을로 함께 개칭되었다가 주민들의 건의로 2007년 밭매우마을로 다시 바뀌었다.
방축(防築)
  • 기록에 따르면 방축리(防築里)는 동쪽으로 배를 매어 두는 배 맨 산의 형상이 있고, 마을에는 물이 가득 고인 방죽이 있어 제방을 막아 취락을 이루었다 하여 방죽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마을이 삽살개가 쪼그리고 앉은 쥐를 쫓으려고 하는데 그 옆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어 쫓아가지 못하는 형상이라 ‘방축(尨逐)’이라 하였던 것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방축(防築)’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고례(古禮)
  • 풍수지리학상 고승례불(高僧禮佛)의 준말로,보록산이 고승이고 청룡등이 목탁이며 범덕굴 백호등이 목탁을 때리는 채로써 아미산의 부채에게 예불하는 형상임. 옛날 북쪽 정골에 주거하다가 도둑이 심해 새터로 내려와 오씨(吳氏)가 살다가 현재 위치로 옮겨 설씨(薛氏)양씨(楊氏)가 세거하게 되었다 이마을은 원래가 예촌(禮村)이라 부르다가 고례(古禮)라고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정(松亭)
  • 2백여년 전 평산 신씨가 터를 잡아 벼락마을이라 불리어 왔는데 마을 앞에 있는 집채만한 바위가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져 생긴 모양이라 하여 송정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1백30여년 전 마을 입구의 큰 소나무 밑에 있는 정자를 보고 지나는 선비가 송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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