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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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명 유래

마을명 유래
마을명 유래
추령 (秋嶺)
  • 추령, 옥정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이 마을은 정읍시 내장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1983년 서지에서 추령으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지 (瑞芝)
  • 인근 마재마을 앞 정자나무에 있는 까지 집에서 불이나 마을까지 전소되어 마재 마을에 살던 하씨가 이 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후 임진왜란 때 광산 김씨가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창하였다. 마을 앞산에 사자앙천 바위가 길지로 보고 있으며 1914년 인근 하마와 함께 서마리로 병합되었다가 1971년 서지로 분리되었다.
하마 (下馬)
  • 하씨가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뒷산의 혈맥이 말의 형국이라해서 마재라고 부르며 웃마재, 아랫마재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
    1914년 서마리에 병합되었으나 웃마재는 6.25 동란으로 전소되어 사라지고 1971년 서마리에서 하마로 분리되었다.
화양 (華陽)
  • 고려 말 행주 기()씨가 이 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3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양림동으로 불리다가 마을이 번창하면서 서북쪽으로 5 백 m 지점에 봉서라는 자연부락이 형성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림동과 봉서를 병합 화양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산 (東山)
  • 고려 때 전주 이씨가 이 곳에 터를 잡았으며 마을 이름은 하사 구술동산으로 불리었으며 상치, 하치, 복흥을 다스리는 삼방(三坊)에 옥천현으로 현감이 이 곳에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산, 안산 2개 자연부락을 합하여 동산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성 (月城)
  • 전주 이씨가 이 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 뒷산은 개가 달을 보고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하여 월명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자포와 반월리의 법정리가 되었다가 1971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월성이 되었다.
자포 (子抱)
  • 고려 말 김해 김씨가 맨 처음 마을터를 잡아 뒷산 암봉이 두 개의 알을품은 형국이라 해서 마을을 자포라고 부르게 되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월성과 함께 반월리로 병합되었다가 1971년 자포리로 분리되었다.
덕흥 (德興)
  • 내장과 백양을 잇는 중간에 위치하여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마을 이룬 것은 3백 10여년 전 인근 심홍리에서 권치근(權治根)씨가 이사와서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번영을 뜻하는 마을 이름을 짓고 1914년 행정개편으로 대가와 합하여 법정리가 봉덕리가 되었다
대가 (大佳)
  • 온천 지구로 지정되어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됐던 곳으로 1989년 12월 30일 온천지구 고시와 함께 세인의 관심을 모은 고장이다. 조선 초 이조정랑을 지냈던 한익상(韓益相)이 영광 원님과 내기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으로 원님을 때려 실신시킨 후 이 곳에 피신하여 마을을 이루어 마을 이름을 상성기라 하였다가 이후 한가락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대가리로 불렀다.
농암 (農岩)
  • 마을에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중심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장터가 있었고 휴암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후 이 휴암에 살고있는 설씨가 이곳에 정착하였으나 주위에 바위가 많아서 농암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농, 하농, 성자 3개 부락을 묶어 농암이라는 법정리를 만들었다.
지선 (芝仙)
  • 용교와 명지동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옛날 장씨가 최초로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 하천에는 큰 바위가 여러개가 있어 하천을 건너는 교량 역할을 하엿는데 바위모양이 마치 용의 형체와 흡사하다하여 마을 이름을 용교라고 부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교, 명지가 합하여 지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두 (江頭)
  • 마을 어귀에 계금치라는 준령이 있어 준령의 이름을 따서 금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두라 바뀌었고 인근 칠립과 합하여 금월리가 되었다.
칠립 (漆笠)
  • 옛날 사찰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기와조각 등 흔적이 출토되기도 하며 마을은 설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뒤 대각산이라는 산에 장군대좌라는 혈맥이 있어 마치 장군이 갓을 쓰고 앉아있는 형국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칠립이라 하였다.
대각 (大角)
  • 대각산의 장군대좌 혈맥 중 마을 뒷산이 투구 모양이라하여 대강등으로 불리다가 1996년 7월 1일 주민들의 건의로 칠립에서 분리하여 대각리로 조정되었다.
어은 (魚隱)
  • 임진왜란 때 전주 최씨가 피난와서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 앞산의 혈이 마치 붕어가 숨어있는 형상과 닮았다하여 어은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칠현 (七絃)
  • 부안 김씨가 처음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로 뒷산이 마치 일곱줄의 거문고와 같은 혈맥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칠현이라 지었다가 1914년 마을 이름을 갈원으로 바꾸고 인근 용지마을과 합병하여 대방리가 되었다.
  • 옛 명칭을 되찾아 후손들에게 마을유래를 알리고 마을명을 지형에 맞도록 2013년 7월 15일 갈원에서 칠현으로 변경하였다.
용지 (龍池)
  • 전주 최씨가 이주하면서 금방동, 용지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으며 마을 서쪽에 용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고 바위 밑에는 연못이 있어 마을 이름을 용지라 불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연못에 용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용이 하늘로 승천하면서 용의 꼬리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두동강이 났다고 하며 지금도 2개의 바위가 있다.
정동 (鼎洞)
  • 한양 조씨가 정착하며 형성된 마을로 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동서쪽 1 km 지점에 천마입구(天馬入口)라는 혈이 있으며 마을 뒷산 혈이 솥의 형국이라 해서 "말의 먹이를 삶는 솥"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정동이라 하였다. 6.25 때는 마을 앞산을 중심으로 주변산을 둥글게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공비와 밤마다 격전을 벌이기도 했었다.
비거 (碑巨)
  • 마을 이름은 풍수지리에 능통한 대사와 면담을 하였던 바 이 곳이 장차 면의 중심이 될 것이고 소재지가 되면 비가 많이 건립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비거라는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동서 (東棲)
  • 고려말 김해 김씨가 터를 잡았으며 남쪽 산맥이 학이 산으로 들어가는 형국인데 동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혈맥과 연관지어 학이 동쪽에 집을 지었다하여 동서리라 부르게 되었다.
산정 (山亭)
  • 마을 뒤에 백방산이 있고 마을 좌우에는 백방산의 준령을 따라 천마입구(天馬入口), 즉 말이 외양간에 들어간다는 혈을 따라 마을 이름을 외양실이라 지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양실과 산정을 합하여 산정리를 만들었고 1971년에는 외오, 내오 마을로 분리했다가 급증한 이농으로 1980년 산정리로 통합되었다.
율평 (栗坪)
  • 마을에 밤, 사과, 배 등 과일나무가 많아서 밤나무 밭이라는 뜻으로 율평이라 부르다가 1914년에는 인근 마을과 합하여 주평으로 부르다가 1971년 다시 율평으로 분리되었다.
송정 (松亭)
  • 이웃 마을에서 광산 김씨가 이 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엇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마을은 오래된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이름을 송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1914년 율평 마을과 합하여 주평리로 만들었다가 1971년 행정구역 개편시 송정으로 분리되었다.
상송 (上松)
  • 임진왜란 때 파평 윤씨가 이 곳에 피난와서 마을을 세웠으며 마을 뒷산인 백방산으로부터 준령을 따라 내려오면 학의 혈이 있는데 학이 솔밭을 향해 날고 있는 것 같으며 우측에는 소란이란 혈이 있어 그 뜻을 따서 마을 이름을 안소란이와 바깥소란이라는 2개의 마을로 소란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중리 (中里)
  • 동쪽으로 7 km 인근마을 삼창에서 김해 김씨가 건너와 마을을 이루었으며 상리, 사창, 중리 3개 마을을 합해 중리를 만들었다. 1914년 쌍치면에 속했던 것이 복흥면으로 편입되면서 인근 사창 마을과 합하여 하리라는 법정리로 분리되었다. 이 마을은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의 출생지로서 1990년 12월 마을 입구에 가인 선생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사창 (社倉)
  • 고려 때 삼방으로 있을 때에는 이 마을이 쌍치면 소재지로 많은 창고들이 즐비하게 지어져 마을 이름을 사창이라 불렀다.
구산 (龜山)
  • 마을 뒷산의 혈이 마치 영구하사(迎龜下沙), 즉 신령한 거북이 모래 밭으로 나온다는 형국으로 마을 이름을 구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사에서 구산으로 바꾸어 인근 답동과 합하여 법정리를 만들었으며 마을은 4백 80여년 전 김해 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신기 (新基)
  • 김해 김씨가 이 곳에 이사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한일합방 당시 인근 새터에 마을을 세웠다하여 새터라 부르다가 1914년 신기로 개칭하여 답동과 법정리가 되었다가 1971년 행정구역 조정때 구산에 속했던 것이 주민들의 건의로 1980년 신기로 분리되었다.
농곡 (農谷)
  • 전주 이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농사짓는 고을이라 하여 논골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대로 전해오고 있으며 1914년 마을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농곡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석 (碑石)
  • 고려 때 밀양 박씨가 처음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주변에는 여러 형의 공적비가 많이 있어서 비석거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914년 쌍치면에 속했다가 복흥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1년 행정구역 조정시 답동리에서 분리되었다.
석보 (石洑)
  • 마을 주변에는 돌산이 많고 앞에는 큰 냇가를 둑으로 쌓아 보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어 마을 이름을 돌보를 따서 독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우리 말로는 독보라고 부르고 있다. 1914년 쌍치면에 속해 있었으나 복흥면으로 편입되면서 마을도 석보라는 법정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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