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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유래

순화(淳化) / 남계(南溪) / 장덕(長德) / 복실(福實) / 백산(白山) / 교성(校星) / 가남(佳南) / 신남(新南)

순창읍 마을명 유래 표
마을명 유래
순화리(淳化里)
  • 통일신라 때 살기좋고 인심이 좋은 곳이라 하여 순화리라 불림
남계리(南溪里)
  • 조선 고종때까지 하천지라 부르다가 1930년에 금산을 뒤에 두고 거울같은 맑은 시냇물이 남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남계라 개칭
장덕리(長德里)
  • 맹씨가 맨처음 터를 잡았다 하여 맹가당이라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 한씨가 맹가터를 지나 닭모양과 같은 바위에 쉬고 있을때 날짐승이 날으면서 닭바위,닭바위,닭바위 하고 3번 우는 것을 보고 닭바위라고 부르게 됨
    이후 덕을 쌓아야만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하여 장덕마을이라 불림
복실리(福實里)
  • 칠원 제씨가 이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복동이라고 하다가 복골이라 하였는데 45년에 해방되면서 복실이라고 함
백산(白山)
  •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 뒷산에서 천용제를 지내고 제사상에 올린 돼지머리는 제를 지낸 후 나무밑에 묻는 풍속이 전해 내려옴
교성(校星)
  • 고려 때에는 오산이라고 하였으며 숙종 당시 군수 조태기가 향교를 완공하여 오늘에 이름
가남(佳南)
  • 가잠(佳岑) : 조선 세조때 신말주와 함께 낙향하여 남산에 살다가 대정으로 이사와서 살았던 선비의 개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찾아보니 현 가잠마을에서 새끼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때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개가 잠자는 형국의 명당이라 하여 개잠이라 불렀으며 조선 고종때 가잠이라 하였다.
  • 남산(南山) : 오산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 함
신남(新南)
  • 대정(大亭) : 해방 전까지 이곳에는 일하다 놀 수 있는 30평정도의 큰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대정이라 하였다.
  • 무수(舞袖) : 남산마을의 고령 신씨가 산수좋은 이곳에 선산을 정하고 묘를 만들어 3년상을 치르는데 스님이 하늘에서 춤을 추고 내려왔다 하여 무수라고 불렀다고 전해짐
  • 탄금(彈琴) : 선녀가 춤을 추고 내려올때 이곳에서 가야금으로 장단을 맞춘 곳이라 하여 탄금이라 칭함
  • 성자(聖慈) : 57년 나환자들이 이사하면서부터 마을을 이루었고 기독교 봉사회에서 신남교회를 설립하면서 성자마을이라고 부르게 됨

호계(虎溪) / 갑동(甲洞) / 도사(道士) / 팔학(八鶴) / 정산(鼎山) / 쌍암(雙岩) / 용암(龍岩) / 장례(藏禮) / 외양(外陽) / 심초(深草) / 탑리(塔里) / 세룡(細龍) / 둔기(屯基) / 대마(大馬) / 가성(加成) / 소마(小馬) / 차치(車峙) / 지산(芝山) / 중산(中山) / 가목(柯木) / 노동(盧東) / 동촌(東村)

인계면 마을명 유래 안내표
마을명 유래
호계(虎溪)
  • 고려 때 전주 최씨가 터를 잡고 그후 초계변씨, 평택 임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조선 초기에 호계방으로 200여호가 모여 살았던 역사가 깊고 장수·효도 마을로 이름이 높은 고장이다.
갑동(甲洞)
  • 남쪽으로 해발 600m가 넘는 건지산(乾芝山)이 우뚝 서있고 북쪽으로는 서남산이 줄기차게 뻗어내려 예부터 학자들이 춤을 춘다 해서 선인무신(仙人舞神) 이라고 불렀고, 대대로 명필이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필봉마을이라고도 불렸음
도사(道士)
  • 옛날 선비들이 호남정맥의 혈을 찾아오던 중 혈이 원통산 아래인 마을터에서 끊겼다 하여 선비들이 혈의 끝부분에 모여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 졌으며 신의 계시를 받은 점쟁이들이 많이 있어 도사리라고 부르게 되었음
팔학(八鶴)
  • 조선 순조때 최씨들이 취락하였고 835년 신라 흥덕왕 10년에 무량국사(無量國師)가 마을 뒷산에 반연암이란 암자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후 갑진년에 다시 학송함을 세움, 그당시 팔학동에는 학8마리가 짝을 지어 살고 있어 이 마을이름도 팔학동이라 부르게 되었음
정산(鼎山)
  • 처음 경주 이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나 이후 남원 양씨가 터를 잡아 대대로 살았던 곳으로 당초에는 계산(鷄山)리라 부르다가 정산리로 이름을 바꿈
    전설에 따르면 가마솥산 아래에는 김이 나는 온천도 있었다 전해오지만 발견되지 않음
쌍암(雙岩)
  • 마을은 일명“맞바위”로 마을 동쪽 산 큰바위와 서쪽 산 큰바위가 쌍둥이 바위처럼 닮아 서로 마주본다 해서 맞바위라 부르게 되었으며, 1935년에 글자 그대로 쌍암이라 부름
용암(龍岩)
  • 용바위의 유래는 선암산 아래쪽 기슭 마을 우측 105m 지점에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에는 용 발자국이라는 흔적이 4개가 있었음
    용이 바위 아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바위에서 잤다 하여 용바위라 불렸으며 1914년 융희8년에 용암이라 부름
장례(藏禮)
  • 옛날는 빗바위라 불리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한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하며, 1937년 행정구역개편
외양(外陽)
  • 고려 때 강씨들이 취락을 형성했으며 유래는 인계면 뒷산에 위치한 갈마음수(渴馬飮水) 8명당의 요건을 갖추기 위하여 주변 마을 이름을 말이 필요한 제반상황을 본떠서 이름을 지음
심초(深草)
  • 마흘리에 말명당이 있어 말의 양식이 되는 짚과 물이 있어야 말이 잘 자랄 수 있다 하여 마을이름을 짚푸실 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심초마을이라 개칭
탑리(塔里)
  • 옛날에는 서울~전주를 오가는 나그네들이 갈재를 넘기전에 이마을에서 잠시 쉬었다 가던 곳으로 한때는 150여호가 넘게 번창했던 마을
세룡(細龍)
  • 조선 문종 원년에 고령 신씨가 맨처음 터를 잡았다고 하며 옛날에 이 마을 앞 냇가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 노인의 꿈에 나타나 “뒷산이 보여 승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어 뒷산을 가려 달라”는 선몽에 노인은 마을주민들과 의논하여 마을 앞에 느티나무를 심었다.
    그후 이무기는 용이 되어 승천하였고 마을 이름은 세룡이라 부르게 되었음
둔기(屯基)
  • 일명 둔터라 부르고 있는데 후백제 견훤의 전쟁터로 최후의 보루가 된 곳으로 그때 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요즘 기왓장 같은 옛 유물이 간혹 발굴 되고 있음
대마(大馬)
  • 전국 8명당의 하나로 유명한 말명당이 자리한 마을로 조선 문종5년 허씨가 정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안동 권씨, 김씨 등이 집단을 이루고 있으며 마흘리라는 이름도 이 말명당 터에서 유래된 이름
가성(加成)
  • 가닥실이라고 불렀는데 일제시대인 1937년에 가성리로 개칭함
소마(小馬)
  • 조선시대에는 효경동이라고 불렀으나 권력에 밀려난 곳은 효(孝)자를 쓰지 못한다 하여 부르지 못하고 근처에 말명당이 있다하여 마래라고 부르다가 마흘리에서 분리되어 소마라 부름
차치(車峙)
  • 고려초 인화방때 마을 앞에 촌락이 생겼는데 강도가 심하여 지금 마을로 옮겨졌으며 일명 수레재라 하였음 조선 중기 전라감사가 지방순시차 갯고개를 거쳐 중산마을을 지나 이 마을까지 수레로 오던 중 도저히 수레가 마을 뒷산을 올라 갈 수 없어 마을까지 걸어 왔다하여 수레재라 함, 193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차치마을이라 명함
지산(芝山)
  • 일명 건지뫼로 부르고 있으며 예부터 자주 수해를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하루는 도승이 지나면서 말하기를 뒷산을 수지산이라 부르면 마을이 물에 큰화를 당하니 이산 이름을 건지산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마을을 건지뫼라 하였음
중산(中山)
  • 증묘(曾墓)라 하여 중매라고 불리웠고 전설에는 원님 서구가 이 마을을 방문할 때 마을이 건지산과 지북 마을 뒤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산이라 불리워짐
가목(柯木)
  • 본래의 마을 이름은 가목정리(柯木程里)였는데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목이라 부르게 되었음
    마을 앞에 약250년쯤 된 참나무가 있는데 전설에는 매년 가축과 곡식 등을 도둑들에게 도난을 당해 부자가 없었는데 어느날 황성주, 황창주 두형제 꿈에 도승이 나타나 “참나무 1그루를 구해서 심으면 도둑들에게 도난당하는 일이 없을 거라 ” 하여 참나무 1그루를 구해 심었는데 이후부터 도둑들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없어 이 마을에 부자가 많이 나왔다 한다.
노동(盧東)
  • 건지산 서쪽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450년전 이루워졌다.
    한때 돌림병으로 마을 주민이 전부 마을을 떠나버린 후 경주 김씨, 청주 한씨가 들어와 오늘에 이르렀다.
동촌(東村)
  • 고려말 주민이 정착해 점점 큰 마을을 이루었는데, 안거집, 근거집으로 부르다가 거집뫼로 부름 마을이 번창하면서 마을 중앙에 돌무덤을 쌍아 이장이 돌무덤에 올라가 마을 주민에게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이곳을 독석뱀이라 불렀다.
    동촌 물통약수는 유명하였으며 조선 중기부터 두언정(물통골 약수터)이라 불러졌으며, 1937년 군청 동쪽에 있다 해서 동촌으로 부르게 되었음

현포(玄圃) / 서호(西湖) / 구미(龜尾) / 어치(於峙) / 동심(同心) / 관전(官田) / 신흥(新興) / 유산(柳山) / 이동(理銅) / 수정(水亭) / 주월(舟月) / 내령(內靈) / 수장(壽墻)

동계면 마을명 유래 안내표
마을명 유래
현포리(玄圃里)
  • 동계면의 현무라 할 수 있는 사자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온 산맥이 오동리 뒤에서 솟아오른 자라봉을 주산으로 관전리 동계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해발 93m의 산맥이 흘러 동계초등 학교까지 같은 해발 93m로 내려온 이 마을이 감밭이다 수원이 없어 모든 농지가 밭뿐이었기에 감음밭이라 하여 감을 '현(玄)'자와 밭'포(圃)'자를 쓴 것으로 기록
서호리(西湖里)
  • 약 300여년 전 남원부에 속해 있을 당시 남원부에는 동서남북 에 4곳의 국창이 있어 서쪽에 있는 이 창고를 지칭하여 서창 이라 했다. 마을 앞에 호수가 있으므로 서창의 서와 호수의 호를 붙여 마을이름을 서호라 명명함
구미리(龜尾里)
  • 구미의 이름은 거북형상의 바위로 인하여 얻어진 것이라 함 남원양씨(南原楊氏)의 종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지칭하 여 가운데골(中洞), 동쪽마을을 장작골(龍洞), 서쪽마을을 뒤주 골(注書洞) 이 3개마을을 통칭하며 동남북 삼방이 둘러놓은 듯한 산중마을이다.
어치리(於峙里)
  • 해발 630m 되는 용골산을 서편으로 하고 용골산 한 가닥의 산맥이 동편으로 내려와 있는 산맥의 중턱에 남동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어치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느제 점촌ㆍ돌무덤ㆍ놋점ㆍ멀테의 5개마을을 통칭하였는데 오늘날 에는 놋점과 멀테는 무인촌이 되어 3개마을이 어치리를 형성 하고 있다.
동심리(同心里)
  • 동심리는 同心ㆍ秋同ㆍ阿同ㆍ梧同 4개 마을을 통칭한 행정구 역을 말한다. 무량산 기슭에 동남방을 안대로 心字형으로 포 근하게 자리잡은 마을로 오동방월(梧洞半月)이라는 물명에서 동심(同心)으로 명명된 듯하다.
관전리(官田里)
  • 이 마을은 현재 벼슬관의 관전(官田)이나 본래는 황새?관? 자를 쓰는 관전(?田)리 였다고 한다. 황새는 원래 공기좋고 물좋은 공해 없는 신선한 곳과 이름난 좋은 터에서만 사는 새 라고 평판이 나 있어 이 관전리는 환경이 좋고 길지(吉地)라 는 것이다.
신흥리(新興里)
  •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윤씨가 처음으로 토착하였다 한다. 합미산에 합미성이 있어 마을 이름을 재앞(城前)이라 하였으나 신흥리로 개칭하였다
유산리(柳山里)
  • 현포리에서 북으로 사자앙천태산이 우뚝 솟아있는 밑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순창ㆍ남원ㆍ임실이 각각 16㎞에 위치함
이동리(理銅里)
  • 이 마을의 형상은 반월형(半月形)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동반 월(東半月)은 길지(吉地)라 하였는데 이월(理月)이라 부르다가 연구세심(年久歲深)한 동안 이울로 되고 또 이동(理銅)이라는 지명은 이울ㆍ동마동ㆍ한사개 등의 지명배경에서 나온 듯하다.
수정리(水亭里)
  • 동계면의 최동단에 있는 마을로 소재지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59㎞지점에 석산마을이 있고 더 올라가면 방아재 양촌ㆍ음촌 내촌이 있다. 수정마을 이름은 수정(水晶)이 난다는 설로 인해 오늘의 수정이 된 것 같다.
주월리(舟月里)
  • 면소재지에서 정동방향으로 5㎞쯤 되는 동계천변에 당그래봉 선인무수(仙人舞袖)의 주령을 북으로 동계천을 앞에 두고 길 게 마을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으로 침강반월(侵江半月)이라 하여 주월리 , 일명 시저울이라 한다.
내령리(內靈里)
  • 조선시대에 남원군 영계방(靈溪坊) 내령 안영계에 있다가 1907년 임실군에 속했으며 1914년에 영계방과 아동방이 합하 여 동계면으로 편입되어 순창군으로 되었다. 1935년에 행정구 역 개편으로 내령마을과 강촌마을로 구분하게 되었다.
수장리(壽墻里)
  • 원래 남원부 영계방으로 있다가 1906년 일제시대 행정개편에 의하여 영계방과 아동방이 순창군으로 편입되고 동계면 수장 리라고 개명되었다. 동계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신촌교를 건 너서 약 1㎞를 가면 가작마을이 있고 수장마을, 하외령마을, 상외령마을이 있다.

지북(支北) / 대산(大山) / 운림(雲林) / 고원(古阮) / 내월(內月) / 평남(平南) / 괴정(槐亭) / 석산(石山)

적성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지북(支北)
  • 봉우리 형상이 갓과 같고 마을을 휘감고 돌아가는 산의 형상이 옥대와 같은 형상이란 뜻에서 갓대라 하여 관대(冠帶)촌이라 하였으나 어느 도인이 마을을 보고 안산은 노호(老虎)로 백호형상이며 마을은 백호와 상대성 지명으로 큰 돼지가 드러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그 형상을 지북(支北)이라 표기. 지북, 태자의 자연마을이 있음.
대산(大山)
  • 원래 죽산이라고 했던 것을 조선말에 와서 풍수객들에 의해 대산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마을 뒷산이 대호하산(大虎下山)형상으로 마을 이름을 대호라고 하면 너무 위압적이기에 대산이라고 칭함. 대산, 묘동의 자연마을이 있음.
운림(雲林)
  • 임동(林洞), 율지(栗枝)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임동은 나무가 무성한 마을이라 하여 임동이라 하였다는 설과 어느 기록에는 중고봉 아래에서 어진 사람이 많이 나서 인동(仁洞)이라고 하였던 것이 임동이 된 것이라고도 하며. 율지는 원래 방갓이라 불렸는데 방립(方笠)의 순수한 우리말이 방갓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가 밤이 아니고 여러개의 방립형상에서 방갓이라 함.
고원(古阮)
  • 관평(官坪), 원촌(院村), 지내(池內), 모산(茅山)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지내는 조선조 말기에 정씨가 취락을 형성하면서 저수지가 있었기에 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내라 하였다고 하나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아랫모사니라고도 함.
내월(內月)
  • 우계(愚溪), 시목(枾木), 내적(內赤), 농소(農所)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시목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감나무가 많이 서 있는 곳에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어느 풍수사의 말에 따라 집을 지어 부자가 되자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감나무골이라 불려왔으며, 농소는 용수막으로 불렸는데 쌍룡등공(雙龍登空)형상으로 용구름이 하늘로 올라가 비를 뿌리는 모양인 용수막(龍需寞)이라 하였던 것으로 이곳에 고려초에 쌍룡사(雙龍寺)가 있었음.
평남(平南)
  • 평남(平南), 구남(龜南)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평남은 적성강과 동계천변에 있기에 옛사람들은 삶의 지혜로 방풍(防風)도 하고 습기를 막기 위하여 강변에 회나무를 많이 심어 회나무 마을이라 하여 회쟁이라 하였다가 큰 마을을 나누면서 평남이라 하였고, 구남은 적성강과 동계천의 합수지점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금거북이가 남수로 내려온다는 말로 금구남수(金龜湳水)형상이란 말임.
괴정(槐亭)
  • 괴정(槐亭), 서림(西林), 마계(馬溪), 신월(新月)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괴정은 마을앞에 수령(樹令)이 약 5백여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로 인해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며, 신월은 1977년 취락구조 개선마을로 처음 조성된 마을로 이 마을의 지형상의 반월같이 생기었으며 동쪽에 뜬 반월형상을 동반월(東半月)이라 하여 동반월 초생달과 같다하여 신월이라 명명함.
석산(石山)
  • 두류봉을 등지고 골짜기에 입석(立石), 강경(江景), 도왕(都旺)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입석은 원래 선돌이라 하여 옛날 부족국가 시설에 부족간의 경계로 돌을 세웠고 그러기에 선돌이라 하였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입석이라 하였고, 강경은 마을 앞으로 적성강이 횡단으로 흐르고 전후좌우로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오지마을로 적성강을 바라보는 광경이나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기에 옛사람들이 강경이라 칭함.

창신(昌申) / 정동(鼎洞) / 건곡(乾谷) / 학촌(鶴村) / 금판(金板) / 외이(外伊) / 내이(內伊) / 오교(梧橋) / 유촌(柳村) / 유천(柳川) / 책암(冊岩) / 무수(無愁) / 화탄(花灘) / 월탄(月灘)

유등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창신(昌申)
  • 조선말 고종 때 역촌으로 사또가 전남 옥과에서 출발하여 이곳으로 경유할 때에 쉬어가는 곳이기 하였다. 창신(昌新)을 193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창신(昌申)으로 바뀌었다. 순창읍에서 동쪽 1 km 거리에 있고 옛날에 역졸이 있었기 때문에 역몰이라고 하였다.
정동(鼎洞)
  • 마을 지명을 새터라 하였고 마을 뒷산의 모습이 솥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솥(鼎)자 정동이라 부르고 있다
건곡(乾谷)
  • 웃건실 또는 건곡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은 건지산(乾芝山)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하여 마를 건(乾)자, 골 곡(谷)자를 붙여 건곡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마을 형국은 선형을 하고 있다.
학촌(鶴村)
  • 마을은 아래 건실 또는 건곡이라 불렀으며 학촌이라는 이름은 풍수설에 뒷산에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학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판(金板)
  • 마을 앞 산에 금이 나와 금굴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풍수설에 의해 금판리라 부르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쇠판리라 부르고 있다.
외이(外伊)
  • 대구 배씨의 13대조와 평택 임씨의 12대조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어 내이 마을과 합하여 법정리를 이루어 마을이 밖에 있어 바깥 이동이라 부르다가 조선말기부터 외이리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이 주형(舟形)이기 때문에 마을 안에 우물을 파서는 안된다고 하여 공동 우물을 마을 주변에 5개를 파서 나무를 1주씩 심어 해마다 5샘 5당산제를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내이(內伊)
  • 고령 신씨의 12대조가 처음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외이리에 속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을이 안 쪽에 있어 안이동이라 부르다가 197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이리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교(梧橋)
  • 옛날에는 머덜이라 불렀으며 마을 중심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오동나무 교량이 있어 오교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유촌(柳村)
  • 버드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버들이라 하였으며 유촌, 유천, 책암이 한 마을을 이루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분리되었다.
유천(柳川)
  • 행정구역 개편으로 버들에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책암(冊巖)
  • 평강 채씨가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뒷산에 선인독서(仙人讀書)라는 명당이 있어 그 곳에서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하여 앞 산에 책인 것과 같은 큰 바위가 있어 책바위라 부르다가 책암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일부는 남원시 대강면에 속해 있다가 1987년 대통령령으로 순창군으로 편입되었다.
무수(無愁)
  • 옛 부터 무시내라 부르다가 무수리로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의 위치가 외세의 침입을 받지 않는 여건으로 언제나 안정되고 평화로워 아무런 근심이 없는 마을이라 해서 무수리라 부르게 되었다. 주민들의 협동 단결은 1980년 176 m 섬진강에 유적교를 건설하여 교통 불편을 스스로 해결, 단결력을 과시했다.
화탄(花灘)
  • 조선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낸 최경옥(본관은 전주)이 태어난 마을이다. 마을은 원래 상촌, 중촌, 하촌의 3개 마을이 합하여 형성된 마을을 이루어 중촌은 꽃의 마음, 꽃심 또는 꽃여울이라 불러오다가 화탄으로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월탄(月灘)
  • 화탄마을에 속했다가 197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탄이라 부르게 되었다.

월산(月山) / 월명(月明) / 유정(柳亭) / 회덕(回德) / 함촌(檻村) / 순정(順亭) / 도치(道致) / 소촌(蘇村) / 가덕(加德) / 송두(松頭) / 안곡(安谷) / 호성(虎城) / 죽전(竹田) / 우곡(牛谷) / 한사(閑寺) / 지내(池內) / 대가(大佳) / 향가(香佳) / 두지(斗池) / 승입(升入) / 상촌(上村) / 용내(龍內) / 상죽(上竹) / 하죽(下竹)

풍산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월산(月山)
  • 옛날에 순창 설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자 4백여년 전에 안동 김씨가 터를 잡고 마을 이루어 도라미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반월리로, 1935년에는 월산과 월명으로 분리되었다.
월명(月明)
  • 마을은 4백여년 전 전주 이씨가 처음 터를 잡고 동해굴에서 해가 뜬다해서 동굴이라 불러오다가 반월리에 속했으나 1935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명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정(柳亭)
  • 마을은 3백여년 전 전주 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며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이라 하여 유정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회덕(回德)
  • 마을은 2백 50여년 전 고령 신씨가 처음 터를 잡아 정착하였으며 옛마을 이름은 점멀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으로 부르게 되었다.
함촌(檻村)
  • 마을은 처음 옥천 조씨가 자리를 잡았고 마을 앞에 큰 보가 있는데 이 보 이름이 함보라고 불러 이 보 이름을 따서 함멀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촌이라 부르고 있다.
순정(順亭)
  • 마을은 3백여년 전에 나주 최씨가 처음 자리를 잡아 오늘에 내려오고 있다. 옛날 선비 한 분이 쉬어가면서 휴운정이라 부르다가 유정리에 속했으나 1935년에 유정리에서 순정리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치(道致)
  • 마을은 5백여년 전에 설산 옆으로 매봉이 있고 꿩이 엎드려 있는 곳에 언양 김씨인 김상백(金相伯)이 처음 마을 터를 잡아 복치마을이라 불려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치라 부르고 있다.
소촌(蘇村)
  • 고려 때 소씨가 마을 터를 잡고 시랑 벼슬을 하게 되어 소시랑골이라고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소촌이라 부르고 있다.
가덕(加德)
  • 옛날에 경주 최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뒷산에 봉우리가 3개 있다하여 삼촌봉으로 부르다가 193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덕이라 부르게 되었다.
송두(松頭)
  • 마을은 조선 고종때 경주 최씨가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마을이 솔방울 같이 생겼다하여 솔머리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송두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곡(安谷)
  • 1백 80여년 전에 옥천 조씨가 여생을 편안하게 살기위해 마을에 정착하였다.
호성(虎城)
  • 마을은 처음 해주 오씨가 터를 잡아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뒷산이 범의 꼬리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호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덕산(德山)
  • 조선시대 권경중 할아버지께서 안득산에 살고 계시다가 광인(狂人)이 발생하자 터가 좋지 않다고 바같득산으로 옮겼으며 산이 덕스러워서 마을 이름을 덕산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죽전(竹田)
  • 3백 50여년 전 밀양 박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이름을 큰 세실이라 지었다가 대나무가 많아 죽림천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죽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곡(牛谷)
  • 죽전 아랫 마을로서 작은 세실이라고 불리어오다 마을 앞산 골짜기가 황소처럼 생겼다하여 우곡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사(閑寺)
  • 적굴이라 불럿으며 원래 이곳에 한사암이라는 절이 있다가 신도들이 없고 너무 한가하여 폐사되었다는 곳이라 하여 한적골이라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개편때 한사마을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내(池內)
  • 3백여년 전 감들에서 밀양 박씨가 이사하여 정착하였으며 마을 앞 연못이 임진왜란전 만들어졌으며 마을 이름은 모산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내라 부르고 있다.
대가(大佳)
  • 마을 옛 이름은 자라뫼라고 불렀는데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 전 김해 김씨가 터를 잡고 마을의 형국이 마치 자라형이어서 자라뫼라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이후 대가리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으며 1914년 이전에는 오산면 소재지이기도 하였다.
향가(香佳)
  • 3백여년 전 진주 강씨가 터를 잡았으며 앞에는 섬진강물이 흐르고 뒤로는 아름다운 향기가 흘러내려와 행가리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향가리라 하였다.
두지(斗池)
  • 처음 금녕 김씨 한 사람이 조용하고 풍요로운 곳을 찾아 다니다가 두지에 정착을 했으며 마을 앞 연못 모양이 쌀뒤지ㅈ주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뒤주굴이라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지 마을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불려지고 있다.
승입(升入)
  • 3백여년 전에 초계 최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옛마을은 이름을 되드름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승입이라 부르고 있다.
상촌(上村)
  • 동쪽을 향해 집이 형성되어 다른 마을보다 붉은 아침해가 먼저 떠올라 동잣 마을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은 전주 이씨 이상섭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용내(龍內)
  • 전주 이씨와 밀양 박씨가 정착하여 본용촌으로 불렀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내리라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죽(上竹)
  • 3백 60여년 전 선녕 남씨가 자리를 잡고 웃대실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죽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죽(下竹)
  • 안동 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아랫대실로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죽이라 부르고 있다.
오산(鰲山)
  • 풍산면 대가리에 위치한 옛 오산초등학교 자리에 아파트2동에 72세대를 건립하여 2012년 7월 31일자로 대가마을에서 행정분리되어 옛지명인 자라뫼를 뜻하는 오산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수양(水揚) / 발산(鉢山) / 내동(內洞) / 연화(蓮花) / 동전(銅田) / 대장(大場) / 만촌(蔓村) / 대성(大星) / 대각(大角) / 청용(靑龍) / 방성(訪聖) / 석촌(石村) / 남계(南溪) / 호치(虎峙) / 장장(獐藏) / 일목(一木) / 이목(二木) / 계전(桂田) / 신매우(新梅宇) / 매우(梅宇) / 밭매우(밭梅宇) / 방축(防築) / 고례(古禮)

금과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수양(水揚)
  • 옛날 전남 승주군 송광사 금불상을 공주로 옮겨갈 때 이 마을에서 쉬어갔다하여 수양승(修養僧)이라고 불리 움
    당시 증산에서 살다가 큰 불이 나서 부락이 소실되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풍수 물명에 수앵정이라 부르다가 꾀꼬리터라 하였으며 조선중기 순천 김씨 일가가 마을 천변에 수양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버드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는곳이라 하여 수양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름
발산(鉢山)
  • 임진왜란 당시 화순 최씨의 증시조인 최충길(崔忠吉)공이 들어와 형성된 마을인데 왜병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모를 피신시킬 수 없어 마을 뒷산에서 부모를 보호하다가 왜군에게 잡혀 순절하였다.
    뒷산 내룡이 노승예불형(老僧禮佛形)이라 하여 마을이 자리한 형국이 노승의 발형(鉢形)에 속한다 하여 발산(鉢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내동(內洞)
  • 3백여년전 순창 설씨 한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시작된 마을로 가난을 면치 못하고 근근히 살아오던 어느날 한 노승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 집터를 산 밑으로 옮겨야 된다는 말에 따라 옮긴후 마을이 번창하게 되었으며 훌륭한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마을 유형이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내동(內洞)이라 불러 오늘에 이름
연화(蓮花)
  • 3백여년전 남양 홍씨란 사람이 팔도 강산의 유람길에 마침내 아미산(峨?山)기슭에 도착하여 부근에 있는 못을 찾아 물을 마시려다 실수로 그연못에 빠지게 되었다.
    생사가 위급하게 되었을 무렵 요란한 굉음이 아미산 줄기에서 내려와 연못에 다달아서 연꽃으로 변하게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후 다시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한 연꽃이 물위에 거꾸러 떠 있는 형상을 표현하는 말이 연화도수(蓮花倒水)인데, 마을의 형상이 이와 같아 연화마을이라 불림
동전(銅田)
  • 1567년 명종 22년 설씨, 박씨, 김씨, 가씨등 4성이 정착하여 시작된 마을로 구리동 고개에다 사당을 세웠는데 그 고개를 사당재라 부르며 1919년 금동면과 목과면으로 분리 되었다.
    금과면 명산인 아미산 정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려와 자리 잡은 것이 마치 와룡(瓦龍)같고 그 기슭이 꼭 구리 밭같아 동전(銅田)리라 부르기시작하였다
대장(大場)
  • 약400년 전에 유명한 설엽학자(薛燁學子)의 서당(書堂)터이며 학문이 높아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선비들을 가르쳐 과거(科擧)에 많은 사람들을 급제(及第)시켜 훌륭한 제자(弟子)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이선생의 추천(推薦)없이는 과거를 치를 수 없었다하여 마을이름도 큰 인물(人物)이 배출된 곳이라 하여 대장(大場)이라부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름.
만촌(蔓村)
  • 남원양씨 28대손인 양지영(陽智永)이 복흥면 외양곡에서 이사와서 살며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며 광덕산 능맥이 넝쿨처럼 뻗어내린 끝자락에 넝클넝클 내려와 넝클 만(蔓)자를 넣어서 만촌으로 부름
    이조말엽 금동면(앞냇물 북쪽땅) 목과면(앞냇물 남쪽땅)이 행정구역개편으로 금과면 만촌(蔓村)으로 불리어 현대에 이름
대성(大星)
  • 약400연년전에 형성된 마을로 서쪽 3백m지점에 물위봉이란 산 아래 약2백호정도의 봉현이라는 이름의 부촌이었음
    물위봉이란 지명은 산이 물위에 떳다하여 그렇게 불리웠는데 물이 너무 많이 나와 마을에 피해가 많으니 물위봉의 물구멍을 막아야 된다고해서 이를 막은뒤부터 마을이 점점 망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말에 대성으로 개칭되었는데 그 유래는 하늘에서 7개의 큰별이 떨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에서 서쪽으로 5백m거리에 별이 떨어졌다는 칠성(七星)바위가 있다
대각(大角)
  • 금녕김씨 사람이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여 마을 뒤산이 큰 짐승의 뿔과 같아 대각(大角)이라 부르기 시작함.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의 형상을 와우(臥牛)라고 하나 누워있는 소의 형상으로는 타당치 못하고 황소가 서 있는 모양으로 뿔이 짝지어있는 형상으로 대각이라 불리움
청용(靑龍)
  • 고려 중엽 밀양 박씨가 금동이라 부르고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룸
    후에 풍수지리에 의해 마을의 형국이 푸른 용과 같다하여 다시 바꾸었으며 마을 앞에 물이 귀하기 때문에 생룡이 아니라고도 하여 전쟁과 재난때는 피해를 입지 않아 피난지로 불리어졌으며 그후 행정구역개편으로 청룡(靑龍)이라 칭함
방성(訪聖)
  • 임진왜란 당시 공자의 후손되는 공동(孔童)이 입향하여 공씨 집성촌을 이룸 왜란당시 호가 학제(學濟)인 동자(東字)선생이 전남 화순에서 피난해 왔다 터를 잡아 마을이름을 訪金이라 부름
    1891년 고종 28년에 방금보다는 성인을 찾는 마을이란 뜻으로 찾을방(訪), 성인성(聖) 방성(訪聖)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름
석촌(石村)
  • 조선 숙종때 밀양 박씨 한사람이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며 당시 약3백호나 되는 큰 마을로 번창하였으나 갑자기 식수가 고갈되고 병마가 심하여 다른 곳을 옮겨가는 주민이 많아 마을이 줄어들었다.
    동네 뒤에 돌이 많고 산수가 좋다항 돌고개라 부르던 것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석촌(石村)이라 부르기 시작함
남계(南溪)
  • 4백여년전 김해 김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아오다가 집안이 몰락하여 이사하고 그후에 유신곤(柳晨坤)이란 사람이 인근 호치마을에서 거주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음
    남계 다리앞에 서당재 밑에 동산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남계리에 옮겨오자 마을이 번창함
    풍수지리에 의해 마을 형국이 산에서 야생하는 동물의 혈이 있다하여 냉기라 불리우다 후에 남계리로 불리어 오늘에 이름
호치(虎峙)
  • 7백여년전 고려 중엽 경주 설씨가 처음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룸
    마을 형국이 호랑이 같다하여 범재라 하여 맹호가 재를 넘어가는 모양맹호월령(猛虎越嶺)이미로 범재라 하였던 것이 한문표기에서 호치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장(獐藏)
  • 5백여년전 경주 설씨인 문정공 장수(長壽)라는 사람이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
    마을 뒷산에 있는 고지산이 뛰어가는 노루 형을 하고 있는 형국으로 동쪽의 아미산과 북쪽의 덕진산과 서암산이 같은 형으로 되어 있는데 서쪽의 산세가 약하여 그곳으로 뛰쳐나가는 고지산의 노루형을 본따서 장정리(璋停里)라 부르다 늑곡이라 개칭, 2008년에 장장(獐藏)으로 복원됨
일목(一木)
  • 5백여년전 금녕 김씨가 처음 터를 잡아 이룬 마을로 마을 앞에 오래된 귀목이 있었는데 이 나무가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하여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나 1919년 목과면과 금동면의 합병으로 오지 마을이 되었으며 마을앞 신목을 본따서 일목이라 부름
이목(二木)
  • 고려말 마을 서편 7백m에 서당동이라고 부르는 곳에 왕의 태를 묻는 능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동자석만 남아 있다 마을이름이 언덕 능자와 서당동의 동자를 합해 능동(陵洞)으로 부르다가 191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목(二木)이라 부름
계전(桂田)
  • 1880년경 임실군 삼계면에서 란(亂)을 피해 김광(金光)이 이곳에 와서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지형이 반달형이라 하여 달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를 본따서 계전(桂田)이라 전해오고 있다
신매우(新梅宇)
  • 조선 세조때 휘윤희(諱允熙), 충순위(忠順衛), 소위(昭威)장군이 금과면마암리에서 당시 단종 복위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말에 이 마암리를 매우라 부르다가 삼매우로 외, 중, 신매우를 합하여 행정부락을 이루었으며 광산 김씨, 중매리는 설씨와 홍씨, 신매리는 홍씨가 각각 그 마을의 대종을 이루었다
매우(梅宇)
  • 고려말(高麗末) 두문동 칠십이인중 호(號) 암곡(巖谷)이란분이 관직을 버리고 바위가 돈다는 이곳에 입향하여 마을이름을 마암(磨岩)이라 부름
    이조(李朝) 세종때 풍수지리학에 의해 마을의 형국이 선인독서(先人讀書)라 하여 “아미산은 선비요, 서암산은 촛대봉이요, 매우(梅宇)는 서책이라 하여 선비가 글을 읽는 형국 또는 매화락지(梅花落地)라 하여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매우(梅宇)라 부름
    일제(日帝)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모정리(茅亭里)라 개칭하였고 2008년에 매우(梅宇)로 복원됨
밭매우(밭梅宇)
  • 밭매우는 마을 뒤 산기슭에 수백호의 기와집이 들어선 부촌이었으며 마을터가 ‘키’ 형국으로, ‘키’끝 부분인 마을 앞이 허(虛)하여 탑(塔)을 세워 보비(補備)하였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매우의 밖에 있다하여 밭매우라고도 하였고, 1914년 매우마을이 모정리로 개칭되었을 때 밭매우마을도 외모마을로 함께 개칭되었다가 주민들의 건의로 2007년 밭매우마을로 다시 바뀌었다.
방축(防築)
  • 기록에 따르면 방축리(防築里)는 동쪽으로 배를 매어 두는 배 맨 산의 형상이 있고, 마을에는 물이 가득 고인 방죽이 있어 제방을 막아 취락을 이루었다 하여 방죽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마을이 삽살개가 쪼그리고 앉은 쥐를 쫓으려고 하는데 그 옆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어 쫓아가지 못하는 형상이라 ‘방축(尨逐)’이라 하였던 것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방축(防築)’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고례(古禮)
  • 풍수지리학상 고승례불(高僧禮佛)의 준말로,보록산이 고승이고 청룡등이 목탁이며 범덕굴 백호등이 목탁을 때리는 채로써 아미산의 부채에게 예불하는 형상임. 옛날 북쪽 정골에 주거하다가 도둑이 심해 새터로 내려와 오씨(吳氏)가 살다가 현재 위치로 옮겨 설씨(薛氏)양씨(楊氏)가 세거하게 되었다 이마을은 원래가 예촌(禮村)이라 부르다가 고례(古禮)라고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정(松亭)
  • 2백여년 전 평산 신씨가 터를 잡아 벼락마을이라 불리어 왔는데 마을 앞에 있는 집채만한 바위가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져 생긴 모양이라 하여 송정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1백30여년 전 마을 입구의 큰 소나무 밑에 있는 정자를 보고 지나는 선비가 송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입석(立石) / 신평(新坪) / 신기(新基) / 구항(龜項) / 사정(射亭) / 내월(內月) / 외월(外月) / 광암(廣岩) / 태자(太子) / 상죽(上竹) / 하죽(下竹) / 강천(剛泉) / 백암(白岩) / 이목(梨木) / 통천(通川) / 신흥(新興) / 팔왕(八旺) / 장재(藏財) / 장안(長安) / 동고(東古) / 평지(平地) / 덕진(德進) / 태촌(台村) / 용두(龍頭)

팔덕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立石(입석) 마을
  • 옛지명은 선돌이라 불리웠고 198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입석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新坪(신평) 마을
  • 마을은 3백여년전에 구룡리 입석마을에서 전주이씨 흥덕군파가 새로운 터를 잡아 신평이라 했다. 또 새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어 신평이라칭함.
新基(신기) 마을
  • 마을은 새터마을로 불렀으며 행정구역 조정에 의해 1999.1.9자로 구항에 서 신기로 분리되었음
龜項(구항) 마을
  • 마을은 맨처음 진주강씨가 마을터를 잡았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거북 이 목터라하여 구항이라 칭함
射亭(사정) 마을
  • 옛지명은 활꾸지라 불렀으며 임진왜란으로 피난 온 전주이씨가 정착 후 산세가 좋은 곳에 서당을 건립하여 많은 후손을 양성해온 곳임
內月(내월) 마을
  • 뒷산의 모양이 달을 그리워하는 토끼의 형상이라하여 “달실”이라 불리 웠음. 8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곡을 내월,외월로 분리하였음
外月(외월) 마을
  • 뒷산의 모양이 달을 그리워하는 토끼의 형상이라하여 “달실”이라 불리 웠음. 8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곡을 내월,외월로 분리하였음
廣岩(광암) 마을
  • 뒷산에서 바라볼 때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배실”로 불리웠음. 1914년 행정개편때 마을 윗산 큰바위를 본따서 광암이라 칭함
太子(태자) 마을
  • 마을 뒷산의 형상이 왕자의 형상이라 하여 “태자”로 부르게 되었고 오늘에 이름
上竹(상죽) 마을
  • 옛 부터 대숲말 또는 죽림동으로 칭하였고 조선말까지 팔등방의 소재지로 무이서원(武夷書院)이 있었으며 일제시대 청계리로 개칭하고 198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죽과 하죽으로 분리되었음
下竹(하죽) 마을
  • 옛 부터 대숲말 또는 죽림동으로 칭하였고 조선말까지 팔등방의 소재지로 무이서원(武夷書院)이 있었으며 일제시대 청계리로 개칭하고 198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죽과 하죽으로 분리되었음
剛泉(강천) 마을
  • 천혜의 군립공원 강천산이 위치한 마을이며, 1999.1.9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계리에서 강천으로 분리되었음
白岩(백암) 마을
  • 마을은 5백여년전에 황씨와 유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함. 마을옆 안선 골에 방앗돌이 있었는데 그 바위가 하얗게 생겨 백암이라 칭함
梨木(이목) 마을
  • 마을뒤쪽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골이라 불리다가 그후 행정구역 개편으 로 이목마을이라 칭함.
通川(통천) 마을
  • 마을 뒤 둔터에 남원윤씨가 터를 잡고 살았는데 도사가 마을 맞은편에 있는 초래바위 촛대를 떼어버리면 잘 살 수 있다고 하여 윤씨는 촛대를 뗴어버림. 그 뒤 그곳에서 3일간 붉은 피가 흘렀다고 하여 통천이라 칭함
新興(신흥) 마을
  • 옛 지명은 “분통”이라 하다가 1985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쌍통으로 칭해오다,2003년 3월 1일 분리되어 신흥으로 칭함
八旺(팔왕) 마을
  • 지금부터 600백여년 전에 선녀가 터를 잡아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전부 등극하여 정승에 올랐다하여 팔왕이라 칭함
藏財(장재) 마을
  • 한솟태라는 곳에서 국씨가 살다가 그곳에 뱀이 많이나와 살지못하고 이 마을로 이주하여 살면서 부를 누리기 위하여 장재라 칭함
長安(장안) 마을
  • 1천 5백여 년 전 하씨, 윤씨, 김씨가 취락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를 저장하던 군창이 있었다 하여 평창으로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안마을이라 칭함
東古(동고) 마을
  • 5백여년전 김해김씨의 자손으로 덕망이 높은학자가 산수좋은 고을을 찾 아 이곳에 정착 동고지라 하다가 행정구역 개편(1972)으로 동고라 칭함
平地(평지) 마을
  • 이곳 이름을 소머리와 같다고하여 와우터라 했고 또한 소의 핑경을 비유 핑경터라고 하다가 말이와전되 핑징으로 발음 오늘에는 핑징이라고 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1972년)으로 평지라고 칭함
德進(덕진)마을
  • 현 팔덕면이 1897년 팔등방과 덕신방으로 분리시 덕진방의 소재지, 효례골이라고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소례골이라고도 함
台村(태촌) 마을
  • 마을은 5백여년전 남원윤씨가 남원에서 살다가 산동지구 구령굴로 이사 하여 생활하고 있다가 태봉산 아래터가 좋다하여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고 함
龍頭(용두) 마을
  • 이 마을은 8백여년전 옥천조씨가 처음 터를 잡으면서 용이 여의주를 물 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용두라 하였음

추령(秋嶺) / 서지(瑞芝) / 하마(下馬) / 화양(華陽) / 동산(東山) / 월성(月城) / 자포(子抱) / 덕흥(德興) / 대가(大佳) / 농암(農岩) / 지선(芝仙) / 강두(江頭) / 칠립(漆笠) / 대각(大角) / 어은(魚隱) / 갈원(渴院) / 용지(龍池) / 정동(鼎洞) / 비거(碑巨) / 동서(東棲) / 산정(山亭) / 율평(栗坪) / 송정(松亭) / 상송(上松) / 중리(中里) / 사창(社倉) / 구산(龜山) / 신기(新基) / 농곡(農谷) / 비석(碑石) / 석보(石洑)

복흥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추령(秋嶺)
  • 추령, 옥정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이 마을은 정읍시 내장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1983년 서지에서 추령으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지(瑞芝)
  • 인근 마재마을 앞 정자나무에 있는 까지 집에서 불이나 마을까지 전소되어 마재 마을에 살던 하씨가 이 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후 임진왜란 때 광산 김씨가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창하였다. 마을 앞산에 사자앙천 바위가 길지로 보고 있으며 1914년 인근 하마와 함께 서마리로 병합되었다가 1971년 서지로 분리되었다.
하마(下馬)
  • 하씨가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뒷산의 혈맥이 말의 형국이라해서 마재라고 부르며 웃마재, 아랫마재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
    1914년 서마리에 병합되었으나 웃마재는 6.25 동란으로 전소되어 사라지고 1971년 서마리에서 하마로 분리되었다.
화양(華陽)
  • 고려 말 행주 기(奇)씨가 이 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3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양림동으로 불리다가 마을이 번창하면서 서북쪽으로 5 백 m 지점에 봉서라는 자연부락이 형성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림동과 봉서를 병합 화양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산(東山)
  • 고려 때 전주 이씨가 이 곳에 터를 잡았으며 마을 이름은 하사 구술동산으로 불리었으며 상치, 하치, 복흥을 다스리는 삼방(三坊)에 옥천현으로 현감이 이 곳에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산, 안산 2개 자연부락을 합하여 동산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성(月城)
  • 전주 이씨가 이 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 뒷산은 개가 달을 보고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하여 월명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자포와 반월리의 법정리가 되었다가 1971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월성이 되었다.
자포(子抱)
  • 고려 말 김해 김씨가 맨 처음 마을터를 잡아 뒷산 암봉이 두 개의 알을품은 형국이라 해서 마을을 자포라고 부르게 되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월성과 함께 반월리로 병합되었다가 1971년 자포리로 분리되었다.
덕흥(德興)
  • 내장과 백양을 잇는 중간에 위치하여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마을 이룬 것은 3백 10여년 전 인근 심홍리에서 권치근(權治根)씨가 이사와서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번영을 뜻하는 마을 이름을 짓고 1914년 행정개편으로 대가와 합하여 법정리가 봉덕리가 되었다
대가(大佳)
  • 온천 지구로 지정되어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됐던 곳으로 1989년 12월 30일 온천지구 고시와 함께 세인의 관심을 모은 고장이다.
    조선 초 이조정랑을 지냈던 한익상(韓益相)이 영광 원님과 내기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으로 원님을 때려 실신시킨 후 이 곳에 피신하여 마을을 이루어 마을 이름을 상성기라 하였다가 이후 한가락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대가리로 불렀다.
농암(農岩)
  • 마을에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중심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장터가 있었고 휴암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후 이 휴암에 살고있는 설씨가 이곳에 정착하였으나 주위에 바위가 많아서 농암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농, 하농, 성자 3개 부락을 묶어 농암이라는 법정리를 만들었다.
지선(芝仙)
  • 용교와 명지동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옛날 장씨가 최초로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 하천에는 큰 바위가 여러개가 있어 하천을 건너는 교량 역할을 하엿는데 바위모양이 마치 용의 형체와 흡사하다하여 마을 이름을 용교라고 부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교, 명지가 합하여 지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두(江頭)
  • 마을 어귀에 계금치라는 준령이 있어 준령의 이름을 따서 금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두라 바뀌었고 인근 칠립과 합하여 금월리가 되었다.
칠립(漆笠)
  • 옛날 사찰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기와조각 등 흔적이 출토되기도 하며 마을은 설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뒤 대각산이라는 산에 장군대좌라는 혈맥이 있어 마치 장군이 갓을 쓰고 앉아있는 형국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칠립이라 하였다.
대각(大角)
  • 대각산의 장군대좌 혈맥 중 마을 뒷산이 투구 모양이라하여 대강등으로 불리다가 1996년 7월 1일 주민들의 건의로 칠립에서 분리하여 대각리로 조정되었다.
어은(魚隱)
  • 임진왜란 때 전주 최씨가 피난와서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 앞산의 혈이 마치 붕어가 숨어있는 형상과 닮았다하여 어은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칠현(七絃)
  • 부안 김씨가 처음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로 뒷산이 마치 일곱줄의 거문고와 같은 혈맥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칠현이라 지었다가 1914년 마을 이름을 갈원으로 바꾸고 인근 용지마을과 합병하여 대방리가 되었다.
  • 옛 명칭을 되찾아 후손들에게 마을유래를 알리고 마을명을 지형에 맞도록 2013년 7월 15일 갈원에서 칠현으로 변경하였다.
용지(龍池)
  • 전주 최씨가 이주하면서 금방동, 용지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으며 마을 서쪽에 용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고 바위 밑에는 연못이 있어 마을 이름을 용지라 불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연못에 용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용이 하늘로 승천하면서 용의 꼬리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두동강이 났다고 하며 지금도 2개의 바위가 있다.
정동(鼎洞)
  • 한양 조씨가 정착하며 형성된 마을로 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동서쪽 1 km 지점에 천마입구(天馬入口)라는 혈이 있으며 마을 뒷산 혈이 솥의 형국이라 해서 "말의 먹이를 삶는 솥"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정동이라 하였다. 6.25 때는 마을 앞산을 중심으로 주변산을 둥글게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공비와 밤마다 격전을 벌이기도 했었다.
비거(碑巨)
  • 마을 이름은 풍수지리에 능통한 대사와 면담을 하였던 바 이 곳이 장차 면의 중심이 될 것이고 소재지가 되면 비가 많이 건립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비거라는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동서(東棲)
  • 고려말 김해 김씨가 터를 잡았으며 남쪽 산맥이 학이 산으로 들어가는 형국인데 동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혈맥과 연관지어 학이 동쪽에 집을 지었다하여 동서리라 부르게 되었다.
산정(山亭)
  • 마을 뒤에 백방산이 있고 마을 좌우에는 백방산의 준령을 따라 천마입구(天馬入口), 즉 말이 외양간에 들어간다는 혈을 따라 마을 이름을 외양실이라 지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양실과 산정을 합하여 산정리를 만들었고 1971년에는 외오, 내오 마을로 분리했다가 급증한 이농으로 1980년 산정리로 통합되었다.
율평(栗坪)
  • 마을에 밤, 사과, 배 등 과일나무가 많아서 밤나무 밭이라는 뜻으로 율평이라 부르다가 1914년에는 인근 마을과 합하여 주평으로 부르다가 1971년 다시 율평으로 분리되었다.
송정(松亭)
  • 이웃 마을에서 광산 김씨가 이 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엇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마을은 오래된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이름을 송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1914년 율평 마을과 합하여 주평리로 만들었다가 1971년 행정구역 개편시 송정으로 분리되었다.
상송(上松)
  • 임진왜란 때 파평 윤씨가 이 곳에 피난와서 마을을 세웠으며 마을 뒷산인 백방산으로부터 준령을 따라 내려오면 학의 혈이 있는데 학이 솔밭을 향해 날고 있는 것 같으며 우측에는 소란이란 혈이 있어 그 뜻을 따서 마을 이름을 안소란이와 바깥소란이라는 2개의 마을로 소란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중리(中里)
  • 동쪽으로 7 km 인근마을 삼창에서 김해 김씨가 건너와 마을을 이루었으며 상리, 사창, 중리 3개 마을을 합해 중리를 만들었다. 1914년 쌍치면에 속했던 것이 복흥면으로 편입되면서 인근 사창 마을과 합하여 하리라는 법정리로 분리되었다. 이 마을은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의 출생지로서 1990년 12월 마을 입구에 가인 선생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사창(社倉)
  • 고려 때 삼방으로 있을 때에는 이 마을이 쌍치면 소재지로 많은 창고들이 즐비하게 지어져 마을 이름을 사창이라 불렀다.
구산(龜山)
  • 마을 뒷산의 혈이 마치 영구하사(迎龜下沙), 즉 신령한 거북이 모래 밭으로 나온다는 형국으로 마을 이름을 구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사에서 구산으로 바꾸어 인근 답동과 합하여 법정리를 만들었으며 마을은 4백 80여년 전 김해 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신기(新基)
  • 김해 김씨가 이 곳에 이사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한일합방 당시 인근 새터에 마을을 세웠다하여 새터라 부르다가 1914년 신기로 개칭하여 답동과 법정리가 되었다가 1971년 행정구역 조정때 구산에 속했던 것이 주민들의 건의로 1980년 신기로 분리되었다.
농곡(農谷)
  • 전주 이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농사짓는 고을이라 하여 논골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대로 전해오고 있으며 1914년 마을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농곡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석(碑石)
  • 고려 때 밀양 박씨가 처음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주변에는 여러 형의 공적비가 많이 있어서 비석거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914년 쌍치면에 속했다가 복흥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1년 행정구역 조정시 답동리에서 분리되었다.
석보(石洑)
  • 마을 주변에는 돌산이 많고 앞에는 큰 냇가를 둑으로 쌓아 보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어 마을 이름을 돌보를 따서 독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우리 말로는 독보라고 부르고 있다. 1914년 쌍치면에 속해 있었으나 복흥면으로 편입되면서 마을도 석보라는 법정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산(芳山) / 종곡(鐘谷) / 신성(新成) / 탕곡(宕谷) / 중안(中安) / 둔전(屯田) /시산(詩山) / 무동(舞童) / 원옥(元玉) / 만수(滿水) / 종암(鐘岩) / 부정(釜井) / 오룡(五龍) / 입신(立新) / 신도(新道) / 산수(山水) / 보평(潽坪) / 금정(金井) / 석현(碩峴) / 피치(皮峙) / 양사(楊舍) / 전암(田岩) / 삼암(三岩) / 반계(潘溪) / 금계(錦溪) / 운암(雲岩) / 양촌(陽村) / 묵산(墨山) / 삼장(三場) / 먹우실(墨牛實) / 피노(避老) / 내동(內洞) / 신촌(新村)

쌍치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방산(芳山)
  • 방매, 사기점, 개운리를 합하여 1914년 방산으로 개칭하였고 조선초기 오(吳)씨와 박(朴)싸가 두암에 이주하여 취락을 이루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매화가 유난히 많아 방매(芳梅)라고 불리우고 있다.
종곡(鐘谷)
  • 장재, 가운이 합하여 적곡으로 불렀으며 마을 뒷산 바위가 종(鐘)과 같아 마을에 길흉이 생기면 종소리를 냈다하여 종곡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재산을 숨겨 두었던 곳에 자리했다하여 장재동(藏財洞), 고지대라서 구름이 쉬어가는 곳이라 해서 가운(暇雲)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96년 1월 15일 적곡에서 종곡으로 마을 명칭이 변경되었다.
신성(新成)
  • 인근 두암 마을에 괴질이 생겨 이를 피해서 새터를 잡았다고 해서 조선초기부터 신성으로 불렀다.
탕곡(宕谷)
  • 선조 때 4색 당파의 한 사람인 김해 김씨가 처음 터를 잡아 탕실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탕곡으로 불렀는데, 이 지역에서 탄(炭)이 나온다 하여 탕곡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안(中安)
  • 풍수설에 학이 알을 품은 형국의 중심지라 하여 중란(中卵)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안이라 개칭되었다. 전설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추령 천변에 한 농부가 송아지를 메어 놓았는데 저녁에 가보니 송아지가 간데없어 아침에 나가보니 추령천에 큰 메기가 송아지를 먹었다는 것, 지금도 추령천에는 메기 바위가 있다.
둔전(屯田)
  • 고려 경종 1년 976년에 군사훈련장 부근 병사들의 막사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어 병사들의 군량미 확보를 위한 전답이 있는 곳이라서 둔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둔전은 1981년 쌍정선이 개통되면서 교통이 원활하고 인근에 문화재 영광정이 자리하고 대학암, 어암서원(魚岩書院), 훈몽재(訓蒙齋)등 역사적인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시산(詩山)
  • 마을 뒷산을 북시봉(北示峰), 철마봉(鐵馬峰)이라고 부르는데 말이 슬피 울어 변을 미리 막아 주었다하여 시산(時山)이라고 불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산(詩山)으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동(舞童)
  • 고려 말 이곳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지내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선몽대로 김씨는 이곳에 자리잡고 뒷산에 올라가 3일동안 제사를 지내니 하늘에서 세명의 동자가 춤을 추면 내려왔다해서 무동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옥산(玉山)
  •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은 옥산리 3개 마을은 무동, 원옥, 만수로 분리되면서 원옥 뒷산에 장군봉이 있어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촌락이 형성되었다하여 원옥이라 부르게 되었다.
  • 「순창군 리의 하부조직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15.04.30 조례 제2259호)에 의거 ‘원옥(元玉)’에서 ‘옥산(玉山)’으로 명칭 변경)
만수(滿水)
  • 마을을 둘러싼 산이 말의 귀처럼 우뚝 솟아있어 마이봉이라 불렀으나 1947년에 설치한 마을 앞 저수지에는 항상 물이 가득하여 마을의 젖줄 구실을 하고 있어 만수라 부르게 되었다.
종암(鐘岩)
  • 단양 우씨가 정읍에서 이주해 정착된 마을로 원래는 북제, 터실, 홀금, 농암의 4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종현의 종자와 농암의 암자를 따서 종암이라 개명하여 부르게 되었다.
부정(釜井)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옥녀봉, 부엌골, 함박골로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터를 가마솥이라 하여 이름을 부정이라 불러오다가 1971년 행정개편에 따라 현재의 부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룡(五龍)
  • 1866년 고종 3년 흥선대원군 섭정때 천주교인이 은신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은 마을로 산세가 마치 용 다섯 마리가 모여드는 것과 같다고 하여 오룡이라 부르게 되었다.
입신(立新)
  • 승어실, 외양실 두 개의 마을이 있어 승어실은 큰 댁, 외양실은 작은댁이라 불리다가 1971년 분리제도에 따라 두 개의 마을을 합하여 입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도(新道)
  • 엄씨가 터를 잡았다하며 그 뒤 홍씨, 권씨 등이 차례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앞 산의 성주봉 물이 범람하여 우리 봉이 생겼고 그 물이 넘쳐 흐르면서 거북이가 넘어졌다하여 마을 입구를 도구미(倒龜尾)라 불렀다.
산수(山水)
  • 조선 초기에 김해 김씨, 안동 권씨, 선령 남씨가 취락을 이루었으며 산세가 좋고 물이 풍부해 극심한 가뭄에도 물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해서 산수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복흥면과 경계를 이루는 치재의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보평(潽坪)
  • 넓은 들에 농사를 위하여 추령천에 보를 막아서 이 곳을 봇들이라고 부르다가 1971년 행정분리로 승격되면서 보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정(金井)
  • 조선 효종 때부터 추령 천변에 펼쳐진 금평 뜰의 농토를 따라 이 마을에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이때 스님 한 분이 지나가며 하는 말이 마을 앞의 강변을 파면 금이 나온다고하여 그 곳을 파보니 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이 솟아나와 금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석현(碩峴)
  • 추령천을 따라 유씨가 이주하여 살게 된 마을로 금평뜰을 지나 밤재로 통하는 뒷길의 고개에 큰 돌이 있어서 그 고개를 돌고개라 불러오다가 1971년 석현이라 개칭하였다.
피치(皮峙)
  • 임진왜란 때 피난 온 김씨 일가가 처음 자리를 잡아 마을터를 이루어 왜란을 피하러 왔다가 정착된 마을이라 하여 원래는 이름을 피재(皮災)라고 부르다가 1971년 양신리에 분리되어 피치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양사(楊舍)
  • 한 선비가 수양을 하기 위하여 4백여 년 전 이곳을 찾아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 곳에 버드나무가 울창하므로 그 버드나무로 집을 지어 마을의 질병과 재난을 막았다고 해서 이름을 양사라 전하고 있다.
전암(田岩)
  • 조선 선조때 부안에서 김해 김씨 한 사람이 이 곳에 약초를 캐러 왔다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격전했던 곳이라 하여 전암이라 부르다가 1914년 밭 농사가 많다하여 전암으로 개칭되었다.
삼암(三岩)
  • 조선 명종 때 참의벼슬을 지낸 박씨라는 사람이 사색당파의 대북과 소북의 싸움을 피하여 이 곳에 내려와 은신하면서 터를 잡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한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삼형제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 하여 석동바위라 부르다가 1971년 전암리에 분리되어 삼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반계(潘溪)
  • 임진왜란 땐 옥구에서 이사온 제주 고씨 한 사람이 처음 자리를 잡고 이를 표시하기위해 은행나무 말뚝을 깊이 꽂아놓은 것이 이듬해 싹이 터 은행열매가 열렸다 하여 삽실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의 추령천이 맑고 좋아서 금계, 아랫마을을 반계라 불렀으며 1914년 두 마을을 합하여 쌍계라 개칭하였다.
금계1(錦溪1)
  • 면 소재지로 반계 마을과 같으며 1971년 쌍계리에서 반계· 금계리로 분리하였고, 2001년 기존의 금계리를 금계1리와 금계2리로 다시 분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금계(錦溪)는 쌍치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뒷산과 마을의 형상이 방계유추형(放鷄遊雛形)으로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자유롭게 노니는 형상이다.
금계2(錦溪2)
  • 2001. 4. 금계리를 금계1리(상가밀집지)와 금계2리로 분리하는 주민공청회가 실시되었고, 2001. 8. 순창군 조례 개정을 통해 분리가 확정되었다.
운암(雲岩)
  • 백제가 정복되면서 신라의 아찬이라는 벼슬을 한 관리가 이곳에 와서 터를 잡으니 그의 벼슬을 따서 아찬마을이라고 부르다가 산속에 마을이 있다하여 내산 혹은 9개의 바위가 있어 구암, 미래에 구름다리가 놓일것이라 하여 운교 등의 이름을 가진 4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14년 운교와 구암의 첫 자와 끝 자를 따서 운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촌(陽村)
  • 조선시대 때 명산이라 부르다가 왜정 때 용전리 1,2구로 구분 양지촌이라 부르다가 6.25 동란 때 전 마을이 소실되고 수복때 다시 복원하여 샛터로 불렀으나 197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묵산(墨山)
  • 조선시대부터 용전리 먹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 오르지 못하고 밭으로 떨어져 용전이라 부르다가 1971년 묵산으로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부르게 되었다.
삼장(三場)
  • 뒷산 골짜기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착한 사람들에게 신약으로 내려주기 위하여 삼(蔘)을 심었다하여 그 골짜기 이름을 삼밭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먹우실(墨牛實)
  • 고련 선종 때에 서산 유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으며 처음에는 길손 나그네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노촌이라 부르다가 이 마을에 김씨가 이장을 하기 위하여 파묘를 할 때 검은 소나기가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먹우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으로 추령천이 흐르고 뒤로는 깃대봉이 있어 산세가 수려하고 지형이 뛰어나 의병들이 전술연마장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많은 싸움이 있었고 그 때마다 많은 피를 흘려 마을에 항상 먹구름이 가시지 않았다 하여 먹우실이라 개칭하였다.
피노(避老)
  • 조선 선조 때 노론, 소론의 당파 싸움에 노론의 한 사람이 피난 은거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이름을 피노라 불렀는데 원래는 하치면의 소재지로 5일장이 섰던 큰 마을이었으며 1894년 11월에 정읍 고부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내동(內洞)
  • 조선 중종때에 현씨와 임씨라는 사람이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절골이란 계곡이 있다. 이 마을은 큰 산 아래 깊은곳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촌(新村)
  • 1962~1963년까지 기독교 봉사회의 지원을 받아 밭 40 ha를 개간하여 이웃 피노, 내동, 삼장마을과 팔덕면에서 박씨 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연산(連山) / 운곡(雲谷) / 남정(南井) / 봉곡(鳳谷) / 둔기(屯基) / 이암(耳岩) / 신기(新基) / 마흥(馬興) / 회룡(回龍) / 오룡(五龍) / 학현(鶴峴) / 통안(桶安) / 율리(栗里) / 산내(山內) / 안심(安心) / 치천(淄川) / 금평(錦坪) / 황계(黃鷄) / 금상(金箱) / 방화(芳花) / 속리(俗里) / 운항(雲項) / 단풍(丹楓) / 유사(酉士) / 장암(長岩) / 오정(五停) / 상리(上里) / 자양(紫陽) / 구곡(九曲) / 어은동(魚隱洞) / 화암(花岩)

구림면 마을명 유래 안내 표
마을명 유래
연 산
  • 삼한시대에 홍성문 대사가 이록을 지나면서 하는 말이 뒷산의 주산을 바라보면서 연부평십자가상(燕浮坪十字街傷)에 연소 명당이 있다 하여 연산(燕山)이라 부르던 것이 1953년 연산(連山)으로 개칭되었다.
운 곡
  • 연산마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 저수지가 있어 ‘방죽안’으로 불렸다. 2003년 연산마을에서 분동되었다.
남 정
  • 조선 선조때에는 무림면 소재지였으나 193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림면이 구림면에 편입되면서 남정이라 개칭하였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풍수설에 따라 마을 뒷산에 항아리 3개를 묻어 놓고 음력 2월 1일이면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워놓고 제사를 지낸 뒤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봉 곡
  • 조선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곳에 피난왔던 진주 강씨와 경주 김씨가 정착하여 구암면의 소재지 마을로 봉새집같은 형국이라 하여 봉곡이라 불렀고 또한 마을이 새의 깃털을 닮았다 하여 새실이라고도 불렀으며 1935년 행정지역 개편으로 사곡(沙谷)으로 개칭했고 96년 1월 15일 봉곡마을로 개편되었다.
둔 기
  • 초계 최싸가 1147년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뒷산에는 대장군봉이 있는데 당시 군사가 진을 치고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둔기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 암
  • 마을의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람의 귀와 같이 생겨 귀바위라고 부르다가 1935년 이암으로 개칭되었으며 마을 입구에 창바위가 있어 건너편 태봉이란 산의 하부능선에 묘를 쓰면 해롭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당산나무는 마을에 도적이 많이 들어와 이것을 막기 위하여 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 기
  • 조선 선조때에 김해 김씨가 처음 터를 잡아 오공동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이마을의 산들을 넘어 고령 신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새터라 하여 신기로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두 마을을 합해서 신기라고 부르고 있다.
마 흥
  • 조선말 옥천 옹씨가 이주하여 정착된 마을로 마을 뒷산이 말이 일어서려는 형국이라 하여 마흥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한 마을 주변에는 물통골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많은 환자들이 줄을 이은 곳으로 유명하다.
회 룡
  • 이 마을은 면 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27Km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태종때에 청주 한씨가 처음 터를 잡아 이루어진 마을로 호곡이란 마을과 합하여 회룡이라 불리우고 있다.
오 룡
  • 고려말 밀량 박씨와 김해 김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며 당시 이 마을 뒷산에는 소()가 있었는데 그 소에서 용으로 승천을 못하게 된 이무기 다섯 마리가 살면서 이 마을에 자주 피해를 주어 마을 사람들이 이를 메꾸어 버리자 다섯 마리 이무기가 5일동안 계속 울다가 죽었다하여 이 마을을 오룡굴이라 부르다가 1935년 오룡이라 불렀다.
학 현
  • 이 마을은 면 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위치한 마을로 조선 성종때에 전주 이씨가 정착한 후 숙종대에 안동 권씨가 이주하게 되면서부터 마을이 번창하게 되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마치 학이 날아가려고 하는 형국이며 또한 마을이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학고개라고 불러오다가 1935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학현이라고 개칭되었다.
통 안
  • 임진외란 때에 마씨와 정씨가 피난 온 것이 정착되어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의 형국이 벌통이며 또한 벌을 많이 기르면 통한다 하여 벌을 많이 키우기 시작하였고 벌이 잘 되려면 마을 앞에 숲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대에 심은 정자나무들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벌이 흥하여 마을 이름을 통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율 리
  • 조선말에 해주 오씨가 처음 터를 잡아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당시 밤나무가 많이 있어 마을 이름을 밤골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193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율리라 개칭하였다
산 내
  • 조선 중엽대 김씨와 조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높은 산 속에 있다하여 산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고려말 이성계 장군의 장래를 위해 무학대사가 만일을 기도하였다 하여 만일사란 사찰이 지금도 있다.
안 심
  • 원래는 아시네라는 마을과 미륵정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를 합하여 안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 천변에 미륵불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불상이 언제인가 홍수로 인하여 위에서 떠내려 온 것을 주민들이 이곳에 세웠으며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이 미륵불을 모시고 있다.
치 천
  • 고려말 조씨, 한씨, 윤씨가 처음 터를 잡아 마을을 이뤘으며 앞냇가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천의 이름이 치천이었기에 마을을 치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앞 천변에 튼 느티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고 하여 옛날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당산이 강해서 여름이 되어도 나무주면에는 뱀이나 개미가 전혀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금 평
  • 고려말 고령 신씨가 처음 터를 잡아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형국이 옥녀씨가 베를 짜고 있는 것과 같다 하여 금평이라 부르기도 했고 배트라라고 불렀다. 마을앞에 큰 바위가 있는데 하천이 범람하여 배를 타고 통행하기 위하여 배를 매 놓았던 바위라 한다.
황 계
  • 조선 영조때 평산 신씨가 맨 처음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앞산이 마치 둥시속에 노란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황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금 상
  • 조선초에 가씨라는 사람이 최초로 터를 잡은 마을로 옆에서 금이 나온다 하여 이름을 금상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방 화
  • 조선 세종때 장수 황씨라는 사람이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은 터가 해당함로라 하여 그 뜻을 푸렁 방화라 부르게 되었으며 특히 예부터 충효사상이 특출한 마을로 효자가 많이 배출되어 마을입구 왼편에 화강암으로 경주 정씨 3효비각이 있다.
속 리
  • 고려말에 추씨라는 사람이 정착하여 이룬 마을로 당시 마을의 산속에 속리사라는 절이 있어 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절터골이라는 이름이 불려지고 있으며 절이 있었다는 흔적으로 탑이 남아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서는 옛날에 천석부자가 여덟사람이나 살고 있었다고 하며 약 2백여년전 주민들이 앞을 막아야 재물이 손상되지 않는다 하여 느티나무 5백그루를 심었다고 입구에 돌탑이 있어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고 한다.
운 항
  • 마을이 언제나 구름속에 묻혀 있어 행복한 마을이라고 해서 마을을 운행이라고 불러오다가 1935년 운항으로 개칭하였으며 마을 뒷산 옆 질재골에는 일제시대 일심교 교주가 도를 닦았던 곳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단 풍
  • 삼면이 해발 500m의 높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마을로 조선 선조때에 전주이씨가 맨 처음 정착하였다. 마을 둘레의 산들이 마치 꽃송이를 이루고 있는 절경으로 중국 고사에서 나오는 황국 단풍을 본따서 단풍쟁이라 불렀다.
유 사
  • 마을 뒷산이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닭사리라 부르다가 1999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월정에서 유사로 분리되었다.
장 암
  • 조선 광해군 원년에 경주 정씨가 처음 터를 잡아 장암이라 불렀으며, 1935년 월정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1999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유사와 행정리가 분리되어 장암이라는 독립마을 이루게 되었다.
오 정
  • 마을 앞에 5그루의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에 정자를 짓고 살면 부촌이 된다는 말을 듣고 정자를 지으면서 오정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 리
  • 마을 뒤에는 해발 558m의 무이사닝 솟아있다. 앞엔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살기좋은 마을로 중구겡 있는 무이산 아래에 있는 마을 형상과 같아하여 그를 본따서 마을 이름을 상리라 부르게 되었다.
자 양
  • 중국의 무림산하에 자양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본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 이 마을에는 화재가 빈번하여 한 풍수설에 마을 뒷산이 학의 형이고 좌우청룡은 복지형이라 학과 꿩이 목마른 곳이므로 그곳에 항아리를 묻어 정월 대보름에 물을 가득 채워주고 제사를 지내면 화재가 없다고 하여 이에 따라 이후 화재를 막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 곡
  • 조선 초기에 이씨가 맨처음 터를 잡았다고 하여 중국 무이산이라는 곳에 구곡리가 있었는데 그 위치와 비슷하여 구곡이라고 개칭하였다.
어은동
  • 구림에서 팔덕면의 경계지점인 동정자재에서 구림천 사이 위치하고 있으며 물고기가 숨은 형상이라하여 어은동이라 칭하였다. 2019년 구곡마을에서 분동되었다.
화 암
  • 고려 공민왕때 진주 강씨, 동래 정씨, 충주 지씨 3성이 이주하여 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처음엔 산재된 세 부락을 합하여 안동과 화암 두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하여 내려오다가 다시 합쳐 합리라고 불리어 오던 것이 1935년 화암으로 바뀌었다. 화암은 뒷산의 바위가 마치 꽃과 같고 바위 틈틈에서 꽃들이 되어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어 마을 이름을 화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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