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虎溪) |
- 고려 때 전주 최씨가 터를 잡고 그후 초계변씨, 평택 임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조선 초기에 호계방으로 200여호가 모여 살았던 역사가 깊고 장수·효도 마을로 이름이 높은 고장이다.
|
갑동(甲洞) |
- 남쪽으로 해발 600m가 넘는 건지산(乾芝山)이 우뚝 서있고 북쪽으로는 서남산이 줄기차게 뻗어내려 예부터 학자들이 춤을 춘다 해서 선인무신(仙人舞神) 이라고 불렀고, 대대로 명필이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필봉마을이라고도 불렸음
|
도사(道士) |
- 옛날 선비들이 호남정맥의 혈을 찾아오던 중 혈이 원통산 아래인 마을터에서 끊겼다 하여 선비들이 혈의 끝부분에 모여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 졌으며 신의 계시를 받은 점쟁이들이 많이 있어 도사리라고 부르게 되었음
|
팔학(八鶴) |
- 조선 순조때 최씨들이 취락하였고 835년 신라 흥덕왕 10년에 무량국사(無量國師)가 마을 뒷산에 반연암이란 암자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후 갑진년에 다시 학송함을 세움, 그당시 팔학동에는 학8마리가 짝을 지어 살고 있어 이 마을이름도 팔학동이라 부르게 되었음
|
정산(鼎山) |
- 처음 경주 이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나 이후 남원 양씨가 터를 잡아 대대로 살았던 곳으로 당초에는 계산(鷄山)리라 부르다가 정산리로 이름을 바꿈
전설에 따르면 가마솥산 아래에는 김이 나는 온천도 있었다 전해오지만 발견되지 않음
|
쌍암(雙岩) |
- 마을은 일명“맞바위”로 마을 동쪽 산 큰바위와 서쪽 산 큰바위가 쌍둥이 바위처럼 닮아 서로 마주본다 해서 맞바위라 부르게 되었으며, 1935년에 글자 그대로 쌍암이라 부름
|
용암(龍岩) |
- 용바위의 유래는 선암산 아래쪽 기슭 마을 우측 105m 지점에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에는 용 발자국이라는 흔적이 4개가 있었음
용이 바위 아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바위에서 잤다 하여 용바위라 불렸으며 1914년 융희8년에 용암이라 부름
|
장례(藏禮) |
- 옛날는 빗바위라 불리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한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하며, 1937년 행정구역개편
|
외양(外陽) |
- 고려 때 강씨들이 취락을 형성했으며 유래는 인계면 뒷산에 위치한 갈마음수(渴馬飮水) 8명당의 요건을 갖추기 위하여 주변 마을 이름을 말이 필요한 제반상황을 본떠서 이름을 지음
|
심초(深草) |
- 마흘리에 말명당이 있어 말의 양식이 되는 짚과 물이 있어야 말이 잘 자랄 수 있다 하여 마을이름을 짚푸실 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심초마을이라 개칭
|
탑리(塔里) |
- 옛날에는 서울~전주를 오가는 나그네들이 갈재를 넘기전에 이마을에서 잠시 쉬었다 가던 곳으로 한때는 150여호가 넘게 번창했던 마을
|
세룡(細龍) |
- 조선 문종 원년에 고령 신씨가 맨처음 터를 잡았다고 하며 옛날에 이 마을 앞 냇가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 노인의 꿈에 나타나 “뒷산이 보여 승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어 뒷산을 가려 달라”는 선몽에 노인은 마을주민들과 의논하여 마을 앞에 느티나무를 심었다.
그후 이무기는 용이 되어 승천하였고 마을 이름은 세룡이라 부르게 되었음
|
둔기(屯基) |
- 일명 둔터라 부르고 있는데 후백제 견훤의 전쟁터로 최후의 보루가 된 곳으로 그때 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요즘 기왓장 같은 옛 유물이 간혹 발굴 되고 있음
|
대마(大馬) |
- 전국 8명당의 하나로 유명한 말명당이 자리한 마을로 조선 문종5년 허씨가 정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안동 권씨, 김씨 등이 집단을 이루고 있으며 마흘리라는 이름도 이 말명당 터에서 유래된 이름
|
가성(加成) |
- 가닥실이라고 불렀는데 일제시대인 1937년에 가성리로 개칭함
|
소마(小馬) |
- 조선시대에는 효경동이라고 불렀으나 권력에 밀려난 곳은 효(孝)자를 쓰지 못한다 하여 부르지 못하고 근처에 말명당이 있다하여 마래라고 부르다가 마흘리에서 분리되어 소마라 부름
|
차치(車峙) |
- 고려초 인화방때 마을 앞에 촌락이 생겼는데 강도가 심하여 지금 마을로 옮겨졌으며 일명 수레재라 하였음 조선 중기 전라감사가 지방순시차 갯고개를 거쳐 중산마을을 지나 이 마을까지 수레로 오던 중 도저히 수레가 마을 뒷산을 올라 갈 수 없어 마을까지 걸어 왔다하여 수레재라 함, 193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차치마을이라 명함
|
지산(芝山) |
- 일명 건지뫼로 부르고 있으며 예부터 자주 수해를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하루는 도승이 지나면서 말하기를 뒷산을 수지산이라 부르면 마을이 물에 큰화를 당하니 이산 이름을 건지산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마을을 건지뫼라 하였음
|
중산(中山) |
- 증묘(曾墓)라 하여 중매라고 불리웠고 전설에는 원님 서구가 이 마을을 방문할 때 마을이 건지산과 지북 마을 뒤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산이라 불리워짐
|
가목(柯木) |
- 본래의 마을 이름은 가목정리(柯木程里)였는데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목이라 부르게 되었음
마을 앞에 약250년쯤 된 참나무가 있는데 전설에는 매년 가축과 곡식 등을 도둑들에게 도난을 당해 부자가
없었는데 어느날 황성주, 황창주 두형제 꿈에 도승이 나타나 “참나무 1그루를 구해서 심으면 도둑들에게
도난당하는 일이 없을 거라 ” 하여 참나무 1그루를 구해 심었는데 이후부터 도둑들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없어
이 마을에 부자가 많이 나왔다 한다
|
노동(盧東) |
- 건지산 서쪽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450년전 이루워졌다
한때 돌림병으로 마을 주민이 전부 마을을 떠나버린 후 경주 김씨, 청주 한씨가 들어와 오늘에 이르렀다.
|
동촌(東村) |
- 고려말 주민이 정착해 점점 큰 마을을 이루었는데, 안거집, 근거집으로 부르다가 거집뫼로 부름 마을이 번창하면서 마을 중앙에 돌무덤을 쌍아 이장이 돌무덤에 올라가 마을 주민에게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이곳을 독석뱀이라 불렀다.
동촌 물통약수는 유명하였으며 조선 중기부터 두언정(물통골 약수터)이라 불러졌으며, 1937년 군청 동쪽에 있다 해서 동촌으로 부르게 되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