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 (芳山) |
- 방매, 사기점, 개운리를 합하여 1914년 방산으로 개칭하였고 조선초기 오(吳)씨와 박(朴)싸가 두암에 이주하여 취락을 이루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매화가 유난히 많아 방매(芳梅)라고 불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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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곡 (鐘谷) |
- 장재, 가운이 합하여 적곡으로 불렀으며 마을 뒷산 바위가 종(鐘)과 같아 마을에 길흉이 생기면 종소리를 냈다하여 종곡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재산을 숨겨 두었던 곳에 자리했다하여 장재동(藏財洞), 고지대라서 구름이 쉬어가는 곳이라 해서 가운(暇雲)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96년 1월 15일 적곡에서 종곡으로 마을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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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新成) |
- 인근 두암 마을에 괴질이 생겨 이를 피해서 새터를 잡았다고 해서 조선초기부터 신성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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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곡 (宕谷) |
- 선조 때 4색 당파의 한 사람인 김해 김씨가 처음 터를 잡아 탕실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탕곡으로 불렀는데, 이 지역에서 탄(炭)이 나온다 하여 탕곡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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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안 (中安) |
- 풍수설에 학이 알을 품은 형국의 중심지라 하여 중란(中卵)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안이라 개칭되었다. 전설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추령 천변에 한 농부가 송아지를 메어 놓았는데 저녁에 가보니 송아지가 간데없어 아침에 나가보니 추령천에 큰 메기가 송아지를 먹었다는 것, 지금도 추령천에는 메기 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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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 (屯田) |
- 고려 경종 1년 976년에 군사훈련장 부근 병사들의 막사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어 병사들의 군량미 확보를 위한 전답이 있는 곳이라서 둔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둔전은 1981년 쌍정선이 개통되면서 교통이 원활하고 인근에 문화재 영광정이 자리하고 대학암, 어암서원(魚岩書院), 훈몽재(訓蒙齋)등 역사적인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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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 (詩山) |
- 마을 뒷산을 북시봉(北示峰), 철마봉(鐵馬峰)이라고 부르는데 말이 슬피 울어 변을 미리 막아 주었다하여 시산(時山)이라고 불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산(詩山)으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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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 (舞童) |
- 고려 말 이곳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지내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선몽대로 김씨는 이곳에 자리잡고 뒷산에 올라가 3일동안 제사를 지내니 하늘에서 세명의 동자가 춤을 추면 내려왔다해서 무동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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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 (玉山) |
-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은 옥산리 3개 마을은 무동, 원옥, 만수로 분리되면서 원옥 뒷산에 장군봉이 있어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촌락이 형성되었다하여 원옥이라 부르게 되었다.
- 「순창군 리의 하부조직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15.04.30 조례 제2259호)에 의거 ‘원옥(元玉)’에서 ‘옥산(玉山)’으로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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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 (滿水) |
- 마을을 둘러싼 산이 말의 귀처럼 우뚝 솟아있어 마이봉이라 불렀으나 1947년에 설치한 마을 앞 저수지에는 항상 물이 가득하여 마을의 젖줄 구실을 하고 있어 만수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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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암 (鐘岩) |
- 단양 우씨가 정읍에서 이주해 정착된 마을로 원래는 북제, 터실, 홀금, 농암의 4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종현의 종자와 농암의 암자를 따서 종암이라 개명하여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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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釜井) |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옥녀봉, 부엌골, 함박골로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터를 가마솥이라 하여 이름을 부정이라 불러오다가 1971년 행정개편에 따라 현재의 부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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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 (五龍) |
- 1866년 고종 3년 흥선대원군 섭정때 천주교인이 은신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은 마을로 산세가 마치 용 다섯 마리가 모여드는 것과 같다고 하여 오룡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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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신 (立新) |
- 승어실, 외양실 두 개의 마을이 있어 승어실은 큰 댁, 외양실은 작은댁이라 불리다가 1971년 분리제도에 따라 두 개의 마을을 합하여 입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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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新道) |
- 엄씨가 터를 잡았다하며 그 뒤 홍씨, 권씨 등이 차례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앞 산의 성주봉 물이 범람하여 우리 봉이 생겼고 그 물이 넘쳐 흐르면서 거북이가 넘어졌다하여 마을 입구를 도구미(倒龜尾)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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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山水) |
- 조선 초기에 김해 김씨, 안동 권씨, 선령 남씨가 취락을 이루었으며 산세가 좋고 물이 풍부해 극심한 가뭄에도 물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해서 산수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복흥면과 경계를 이루는 치재의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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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평 (潽坪) |
- 넓은 들에 농사를 위하여 추령천에 보를 막아서 이 곳을 봇들이라고 부르다가 1971년 행정분리로 승격되면서 보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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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 (金井) |
- 조선 효종 때부터 추령 천변에 펼쳐진 금평 뜰의 농토를 따라 이 마을에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이때 스님 한 분이 지나가며 하는 말이 마을 앞의 강변을 파면 금이 나온다고하여 그 곳을 파보니 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이 솟아나와 금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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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 (碩峴) |
- 추령천을 따라 유씨가 이주하여 살게 된 마을로 금평뜰을 지나 밤재로 통하는 뒷길의 고개에 큰 돌이 있어서 그 고개를 돌고개라 불러오다가 1971년 석현이라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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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皮峙) |
- 임진왜란 때 피난 온 김씨 일가가 처음 자리를 잡아 마을터를 이루어 왜란을 피하러 왔다가 정착된 마을이라 하여 원래는 이름을 피재(皮災)라고 부르다가 1971년 양신리에 분리되어 피치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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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 (楊舍) |
- 한 선비가 수양을 하기 위하여 4백여 년 전 이곳을 찾아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 곳에 버드나무가 울창하므로 그 버드나무로 집을 지어 마을의 질병과 재난을 막았다고 해서 이름을 양사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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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암 (田岩) |
- 조선 선조때 부안에서 김해 김씨 한 사람이 이 곳에 약초를 캐러 왔다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격전했던 곳이라 하여 전암이라 부르다가 1914년 밭 농사가 많다하여 전암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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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암 (三岩) |
- 조선 명종 때 참의벼슬을 지낸 박씨라는 사람이 사색당파의 대북과 소북의 싸움을 피하여 이 곳에 내려와 은신하면서 터를 잡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한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삼형제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 하여 석동바위라 부르다가 1971년 전암리에 분리되어 삼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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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潘溪) |
- 임진왜란 땐 옥구에서 이사온 제주 고씨 한 사람이 처음 자리를 잡고 이를 표시하기위해 은행나무 말뚝을 깊이 꽂아놓은 것이 이듬해 싹이 터 은행열매가 열렸다 하여 삽실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의 추령천이 맑고 좋아서 금계, 아랫마을을 반계라 불렀으며 1914년 두 마을을 합하여 쌍계라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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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1 (錦溪1) |
- 면 소재지로 반계 마을과 같으며 1971년 쌍계리에서 반계· 금계리로 분리하였고, 2001년 기존의 금계리를 금계1리와 금계2리로 다시 분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금계(錦溪)는 쌍치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뒷산과 마을의 형상이 방계유추형(放鷄遊雛形)으로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자유롭게 노니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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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2 (錦溪2) |
- 2001. 4. 금계리를 금계1리(상가밀집지)와 금계2리로 분리하는 주민공청회가 실시되었고, 2001. 8. 순창군 조례 개정을 통해 분리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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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雲岩) |
- 백제가 정복되면서 신라의 아찬이라는 벼슬을 한 관리가 이곳에 와서 터를 잡으니 그의 벼슬을 따서 아찬마을이라고 부르다가 산속에 마을이 있다하여 내산 혹은 9개의 바위가 있어 구암, 미래에 구름다리가 놓일것이라 하여 운교 등의 이름을 가진 4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14년 운교와 구암의 첫 자와 끝 자를 따서 운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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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 (陽村) |
- 조선시대 때 명산이라 부르다가 왜정 때 용전리 1,2구로 구분 양지촌이라 부르다가 6.25 동란 때 전 마을이 소실되고 수복때 다시 복원하여 샛터로 불렀으나 197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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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산 (墨山) |
- 조선시대부터 용전리 먹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 오르지 못하고 밭으로 떨어져 용전이라 부르다가 1971년 묵산으로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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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 (三場) |
- 뒷산 골짜기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착한 사람들에게 신약으로 내려주기 위하여 삼(蔘)을 심었다하여 그 골짜기 이름을 삼밭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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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우실 (墨牛實) |
- 고련 선종 때에 서산 유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으며 처음에는 길손 나그네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노촌이라 부르다가 이 마을에 김씨가 이장을 하기 위하여 파묘를 할 때 검은 소나기가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먹우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으로 추령천이 흐르고 뒤로는 깃대봉이 있어 산세가 수려하고 지형이 뛰어나 의병들이 전술연마장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많은 싸움이 있었고 그 때마다 많은 피를 흘려 마을에 항상 먹구름이 가시지 않았다 하여 먹우실이라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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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 (避老) |
- 조선 선조 때 노론, 소론의 당파 싸움에 노론의 한 사람이 피난 은거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이름을 피노라 불렀는데 원래는 하치면의 소재지로 5일장이 섰던 큰 마을이었으며 1894년 11월에 정읍 고부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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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 (內洞) |
- 조선 중종때에 현씨와 임씨라는 사람이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절골이란 계곡이 있다. 이 마을은 큰 산 아래 깊은곳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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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新村) |
- 1962~1963년까지 기독교 봉사회의 지원을 받아 밭 40 ha를 개간하여 이웃 피노, 내동, 삼장마을과 팔덕면에서 박씨 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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